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우(仲羽). 이홍술(李弘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세정(李世禎)이며, 아버지는 이명익(李明翼)이다.
1755년(영조 3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58년 사헌부지평 재직시 우의정 이후(李후)의 사장(辭章) 문구를 지적, 탄핵하였다가 도리어 왕의 노여움을 사서 정의(旌義)에 유배당하였다.
당사자 이후의 도움으로 곧 풀려나와 수찬·교리 등을 거쳐 1766년 동지 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사간·집의를 역임하였다. 1774년 대사간에 오른 뒤 의주부윤·강원도관찰사·동지의금부사 등을 지냈다.
다음 경기도관찰사로 있을 때, 교동에 수영(水營) 설치를 건의하는 등 관방체제(關防體制) 정비에 진력하였으나, 1782년(정조 6) 광주(廣州) 백성들의 소란사건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 뒤 대사헌·대사간·승지 등을 거쳐 1789년 도승지가 되어 그해 죽자 왕의 치제문이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