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대립(大立), 호는 쌍괴(雙槐). 이승충(李升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봉손(李奉孫)이고, 아버지는 사간 이효독(李孝篤)이며, 어머니는 최명근(崔命根)의 딸이다.
1507년(중종 2) 생원시에 합격, 1513년(중종 8) 식년 문과에서 급제해 권지승문원정자에 제수되었다. 곧 예문관에 들어가 1517년 11월 평안도평사로 파견될 때까지 검열·대교·봉교를 지냈으며,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과 교유하면서 김정 등의 편협하고 과격함을 경계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가 때에는 남곤(南袞)이 고변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나무랐다. 1520년 2월 사간원정언에 발탁되고 그 뒤 홍문관교리, 세자시강원사서, 호조·예조·병조의 좌랑, 정랑, 세자시강원필선, 수원·곤양·옥천의 군수를 역임하였다.
1527년 11월 사헌부장령으로 경연(經筵)에 참여해, 세종이 양녕대군을 방면한 고사를 들어 1513년 박영문(朴永文)·신윤무(辛允武)의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어 쫓겨난 영산군 전(寧山君恮: 성종의 13남)의 사면을 청해 방면하게 하였다. 그러나 강직한 언론을 꺼려한 대신들의 배척으로 파직되었다.
곧 복직되어 사옹원(司甕院)·군기시(軍器寺)·종부시(宗簿寺)의 정(正)과 공주·청주·광주의 목사를 역임하였다. 1543년경 봉상시정(奉常寺正), 1545년(명종 즉위년) 11월 인종의 빈전도감사(殯殿都監事)에 참여한 공로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오르고, 다음해 12월 동지부사로서 명나라에 갔다가 귀국 도중 사류하(沙流河)에서 죽었다.
효행·학행과 강직한 언사로 명망이 있었다 한다.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으나 20여 년간 외관으로 재직하면서 선치를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