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학당 ()

이화학당 보통과 1학년 수업
이화학당 보통과 1학년 수업
단체
1886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초 · 중 · 고등과정의 사립학교.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이화학당은 1886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초·중·고등과정의 사립학교이다. 이화학당은 미국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이 여학생 한 명을 대상으로 학당을 열자 고종황제가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내린 것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학생을 구하는 일이 어려웠지만 점차 보통과·중등과·고등과·대학과 등을 포함한 교육기관으로 성장했다. 이화학당의 초기 학생은 개화지사의 자녀와 부인 등 상류계급 출신과 서민 자녀 등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초창기의 교육이념은 ‘보다 나은 한국인’이었으나 이후 남녀평등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조장·촉진하여 여성해방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정의
1886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초 · 중 · 고등과정의 사립학교.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의 교육제도와 교육내용은 남성을 위한 것이며 여성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그 전대(前代)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여성은 독자적인 개인이라기보다 남성의 그늘로 이해되었다.

여기에 1886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튼(Scranton,M.F.) 부인이 한 여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1887년 고종황제가 ‘이화학당(梨花學堂)’이란 이름을 내린 것으로 시작된다. 이곳에서는 보통과 · 중등과 · 고등과 · 대학과 등을 포함하여 초등교육 · 중등교육 · 대학교육을 다하였다.

이화학당은 한국의 여성교육의 효시이자 여성 지도자를 많이 길러낸 것으로 그 공적이 크다. 1885년 6월에 이 땅을 밟은 감리교 여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은 선교사업의 중요한 분야로 한국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을 세울 것을 결심하고, 1886년 5월경에 여학생 한 명을 상대로 학교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바로 한국여학교의 요람이 된 이화학당이다.

그는 1885년 10월 한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선교부(女宣敎部) 용지(用地)로 선교부(남자)가 소유하고 있는 언덕 위의 가옥을 사들였다. 이 부동산은 초가집 열 아홉 채와 그 옆에 있는 버려둔 빈터였다. 스크랜튼 부인은 이 초가집들을 고쳐 학생을 가르치기 위한 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이화학당 건물은 1886년에 완성되고, 그 해 11월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스크랜튼 부인의 마음에는 1885년 8월 이전부터 학교는 미리 개설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년 12월까지 여학생이 나타나지를 않았다.

남자들은 많았으나 여자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한국에 와서 여학생을 모집하려고 무척 노력하고 있을 때, 이 사실이 황실에 알려졌는지 스크랜튼 부인은 아래와 같이 보고하고 있다.

“황제는 내가 한국에 온 목적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소식을 듣고 계십니다. 황제는 대단히 따뜻한 격려의 말씀을 보내 주셨으며 며칠 전 그는 어떤 모임에서 연설하는 가운데 여자학교에 대해 찬성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스크랜튼 부인은 1886년 5월 31일 밤 드디어 한 사람의 여성을 학생으로 맞이했다. 그가 근 1년 동안 기다리던 첫 학생이었다. 그것도 학생의 어머니에게 학생의 신변을 보증한다는 서약서까지 주고 입학시킨 것이다. 서약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미국인 야소교 선교사 스크랜튼은 조선인 박(朴)씨와 다음과 같이 계약하고 이 계약을 위반하는 때는 어떠한 벌이든지 어떠한 요구든지 받기로 함. 나는 당신의 딸 복순(福順)이를 맡아 기르며 공부시키되 당신의 허락이 없이는 서방(西方)은 물론 조선 안에서라도 단 십리라도 데리고 나가지 않기를 서약함. 1886年 月 日. 스크랜튼”

사실 스크랜튼 부인은 처음에 양반집의 자녀를 학생으로 구하고자 하였으나 구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가난한 집의 아이와 고아를 학생으로 얻었던 것이다.

당시 선교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 여학생이 들어온 것은 마치 구원을 얻은 기쁨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이화학당뿐만 아니라, 이 당시 설립된 여학교사(女學校史) 혹은 여학교지(女學校誌)를 읽어보면 공통적으로 지적되고 있는 점이다.

이런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이화학당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초의 여학교가 된 것이다. 1887년 학생이 7명으로 늘어났을 때, 고종황제는 스크랜튼 부인의 노고(勞苦)를 알고 친히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을 지어주고 외무독판(外務督辦) 김윤식(金允植)을 통해 편액(扁額)을 보내와 그 앞날을 격려했다.

당초에 스크랜튼 부인은 교명(校名)을 전신학교(專信學校, Entire Trust School)라 지으려 했으나, 고종황제의 은총에 화답하는 마음으로 ‘이화’로 택하였다.

이는 당시에 황실을 상징하는 꽃이 순결한 배꽃[梨花]이었는데, 여성의 순결성과 명랑성을 상징하는 이름이었기때문이다. 한국의 배꽃은 프랑스의 나리꽃[百合花]이나, 영국 랭커스터(Lancaster)가(家)의 붉은 장미꽃에 비유되는 꽃이다.

이 때부터 부녀자들간에는 풍문으로만 듣던 서양 사람도 보고 양국관(洋國館, 이화학당)에서 수업하는 학생들도 구경하기 위해 이화학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오면 스크랜튼 학당장은 으레 이경숙(李慶淑) 선생에게 교사(校舍)를 공개하고 상세히 설명하도록 하였다.

이경숙은 1851년 충청남도 홍성의 가난한 선비의 집에서 태어나 15세때 결혼했으나 일찍 남편을 여의고 여승이 되었다가 39세 때 선교사의 한국어 선생인 친구 남편의 소개로 스크랜튼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양반가문의 후예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한문과 한글공부를 많이 해둔 것이 인연이 되어 이화학당의 한글선생 겸 스크랜튼의 비서격으로 채용되었다.

그는 한글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이화학당을 구경오는 많은 부녀자들에게 교사를 공개하고 안내하면서 서양문명을 이해시키는 데 힘썼고 이화학당과 가정주부들과의 유대를 강화시켜 나가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 후, 이화학당은 1888년에 학생 수가 18명으로, 다시 1893년에는 30명으로 늘어났다. 1890년 박영효(朴泳孝)의 딸이 이화학당에 와서 스크랜튼 부인과 함께 기거하며 공부했다는 것을 보면, 이화학당의 학생 구성은 개화지사(開化志士)의 자녀와 부인 등 소수의 상류계급 출신과 서민자녀 등 양극의 층으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이화학당이 설립되어 여성교육의 초석을 놓을 무렵, 1893년 제1회 선교사공의회(宣敎師公議會)에서 결정된 선교 정책도 “부인들을 개종시키는 일과 그리스도교 신자인 소녀들을 교육하는 데 특별히 힘쓸 것, 이는 가정의 주부가 후손들의 양육에 주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고 하여, 여성교육의 시급함을 말했다.

이화학당의 교육이념은 ‘보다 나은 한국인(Koreans better Korean's only)’이라는 사상 위에 이를 향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였다. 이는 스크랜튼 부인이 이화학당의 목적과 교육방침을 말한 것에서도 말할 수 있다.

즉, “우리의 목표는 여아(女兒)들을 외국인의 생활 · 의복 및 환경에 맞도록 변하게 하는 데 있지 않다. 이따금 본국(미국)이나 현지(한국)에서 우리 학생들의 생활 전부를 뒤바꿔 놓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우리는 단지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으로 만들고자 노력할 뿐이다. 우리는 한국인이 한국적인 것에 대하여 긍지를 갖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을 통하여 완전무결한 한국을 만들고자 희망하는 바이다.”

그런데 당시의 사회적인 조건 때문에 근대여학교의 교육 내용은 신학문보다 한문(漢文)의 비중이 컸었다. 1897년 이화학당의 경우만 보더라도 학생들이 한문을 정규 과정으로 넣어 달라고 학교당국에 요청하였다. 그 이유는 남자들은 한문을 배우는 데, 왜 여자들은 배우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이 시기의 여학교 교사는 여성으로 한정되었다. 1893년 선교사들의 보고서에 의하면, 초기 여학교에서의 각 학과 담임선생은 모두 여선생(선교사)들이었다. 이는 한국 풍속에 의하여 여자가 남자선생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문 담당만은 남자선생이 맡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한문 담당의 남자 선생은 여학생을 마주 보고 가르치지 못하고, 항상 뒤로 돌아 앉아서 여학생이 묻는 것에만 뒤돌아 앉은 채 대답을 해 주는 식으로 학생을 가르쳤다.

또, 여학생들의 체조에 얽힌 에피소드도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화학당에서 처음으로 여학생들에게 손을 번쩍 들고 발가랑이를 벌리며 뜀질을 시키는 체조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 체조는 당시 사회의 윤리문제로까지 비약하여 큰 말썽이 되었다.

당시 반상(班常:양반과 상사람)이 심한 가문에서는 여자가 걸을 때 발꿈치에서 발끝까지의 길이 이상 발을 떼어서는 상스럽다 하여 엄하게 걸음걸이를 다스렸던 것이다. 그런 판국에 체조시간에 여학생들이 발가랑이를 번쩍 든다는 것은 파문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래서 학부형들은 하인을 시켜 그들의 딸들을 업어내 오기에 바빴고, 체조하는 딸 때문에 가문을 망쳤다고 가족회의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사회에서는 이화학당에 다닌 여학생은 며느리를 삼지 않겠다는 풍조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에 한성부(漢城府)에서는 정식으로 이화학당에 공문을 보내 체조를 즉각 중단할 것을 통고까지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여러가지 사회적인 제약 속에서도 이화학당 학생들은 1899년 5월에 창의문(彰義門) 밖으로 꽃 놀이를 간 일이 있다. 이는 여성들의 의례적인 나들이 외에 외출이란 전혀 허락되지 않았던 당시 사회에 있어서 여학생들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온 일이었다.

이에 대하여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 제3권 19호(1899년 5월 10일자)에는 아래와 같이 말해 주고 있다. “정동 이화학당 여학생들이 일년 동안 애쓰고 공부하다가 봄빛을 따라 창의문 밖으로 화류(花柳)구경을 갔더라 하니, 우리가 매우 치하하는 것은 여학원의 화류는 500년 이래 처음이다.”

그러다가 이화학당은 1908년 5월에 창립기념 행사와 더불어 제1회 운동회(運動會)를 개최하였다. 그것은 여러 관중과 학생들을 위해서 메이 데이(May day) 순서에 경기 프로를 몇가지 더 첨가해서 되풀이한 것이다. 김윤식은 이화학당의 운동회에 참석하고서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정동 이화학당에 가서 춘기 대운동회(春期 大運動會)를 구경하였다. 어제 미국인 교사 시난돈(施蘭敦, 스크랜튼)이 와서 청하길래 가 본 것이다. 여학생 1백여 명이 규모도 정숙하게 발걸음을 같이하는 품이라든지 갖가지 경주 등 볼 만하였다. 이같이 진취(進取)한 것은 가르침의 힘이지라.”

의의와 평가

이와 같은 어려운 사회적인 여건 속에서도 이화학당에서는 점차 남녀평등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조장 · 촉진하여 수백년의 구습이던 내외법(內外法)과 축첩제도를 폐지시켜 나갔다. 실로 선교사들이 남녀평등관에 입각하여 처음으로 이화학당을 세운 것은 여성교육의 개척자(開拓者)의 역할이었고 여성해방의 큰 기쁨이기도 했다.

참고문헌

『이화팔십년사』(이화여자대학교, 1967)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L.G.Paik, Younsei University Press, 1970)
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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