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방(子方). 이경종(李慶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주(李澍)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이창정(李昌庭)이며, 어머니는 이응명(李應明)의 딸이다.
1631년(인조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대교 등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세자시강원사서로서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인질로 청나라에 갈 때 따라갔다.
이 때 심양에서 채유후(蔡裕後)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유신(庾信: 중국 남북조시대 북주(北周)의 문장가)의 「애강남부(哀江南賦)」를 읊어 서로 통곡한 일이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돌아온 뒤에 벌을 받아 일시 파직되었다.
청군에 의하여 강화도가 함락되었을 때, 대신 윤방(尹昉)이 묘사제조(廟社提調)로서 신주를 분실하고 자기 몸만 피해 갔다 하여 이를 탄핵, 유배당하게 하였다.
그 뒤 지제교·정언·지평·장령 등을 지낸 다음, 각 지방의 수령을 역임하고, 1648년 강릉부사로 있을 때 치적이 뛰어나 모범관리로 표창받았다. 그 뒤 1664년(현종 5) 광주부윤(廣州府尹)을 끝으로 관직을 떠났다. 제주 귤림서원(橘林書院) 별사(別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