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보(樂甫), 호는 도촌(道村). 이몽우(李夢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진(李瑱)이고, 아버지는 교리 이상질(李尙質)이며, 어머니는 정엽(鄭曄)의 딸이다.
1661년(현종 2) 천거에 의하여 영릉참봉(寧陵參奉)·내시교관(內侍敎官)을 거친 뒤 1665년 정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1669년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뽑혀 6품관에 올라 성균관전적·정언·헌납·홍문관부수찬·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671년 이조좌랑을 거쳐 홍문관교리로 있을 때 지제교를 겸임하였고, 1673년 이조정랑에 올랐다. 이어 의정부사인·세자시강원보덕을 지낸 뒤, 홍문관응교에 재임시 유배당한 김수흥(金壽興)·남이성(南二星) 등이 속히 환원되어야 함을 왕에게 요구하였으며, 대왕대비의 복제문제로 남인과 왕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곧 사간이 되었으나 종래의 예론복제문제(禮論服制問題)와 관련, 남인 일파가 일세유종(一世儒宗)인 송시열(宋時烈)을 비난 공격하는 여론을 계속 일으키고 있다 하여 그들에게 죄줄 것을 청한 계문(啓文)을 올렸다가 도리어 왕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이 때 도승지 김석주(金錫胄), 좌승지 안진(安縝) 등 승정원이 모두 왕명을 철회할 것을 극간하였으나, 파당을 옹호하는 태도를 용서할 수 없다 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순천부사·인동부사·첨지중추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