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3월에 단편소설 「덕성(德性)」이 평론가 백철(白鐵)에 의해 『문장』에 추천됨으로써 등단하였다. 광복 직후 조선청년문학가협회에 참여하였고, 한국전쟁 때 월북하였다. 이후 행적은 미상이다.
월북할 때까지 그가 발표한 작품으로는 「산으로 가는 사람」(야담, 1941.11.)·「성서(聖書)」(춘추, 1942.3.)·「봄」(민성, 1946.4.), 「주막(酒幕)」(문화, 1947.4.)·「고행(苦行)」(서울신문, 1948.1.13.)·「노년(老年)」(개벽, 1948.5.)·「신생서장(新生序章)」(신천지, 1948.6.)·「요람(搖籃)」(민성, 1949.1.)·「교착(交錯)」(신천지, 1949.5.)·「태문(苔紋)」(부인, 1949.11.)·「동자상(童子像)」(민성, 1949.12.)·「소(牛)」(백민, 1950.2.)·「미행(尾行)」(문학, 1950.6.) 등이 있다.
그는 1930년대의 우리 소설계에서 중요한 흐름의 하나를 이루었던 이른바 심리주의의 계보에 연결되는 자리에서 창작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데뷔작 「덕성」을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제 말의 암흑기를 침묵으로 보낸 후 광복을 맞이하면서 창작 활동을 재개한 그는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즉, 밀폐된 개인의 자의식을 따라 다니는 데서 탈피하여 사회적 현실과 그 속에서 영위되는 대중의 고통스러운 삶을 직시하는 쪽으로 창작의 지표를 고쳐 잡는 것이다.
특히, 가족의 테두리를 중시하고 그것을 전면에 내세워 당대 사회의 문제를 조명하고자 한 시도가 주목된다. 거기서 가장 중심적인 관심사로 부각되는 것은 해방 공간의 정치적 문제들이지만, 작가의 시선이 거기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낡은 가족제도의 모순이라든가 노년의 존재론적 고독이라든가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조명이 가해지고 있다.
물론 작품 속에 나타난 갈등의 밀도가 엷다든지, 상식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난 경지를 보여주지 못했다든지 하는 한계점도 지적될 수 있다. 그가 남긴 창작집으로는 『감정의 풍속』(동방문화사, 1948)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