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금성(錦城). 자는 익여(翼如), 호는 송석(松石). 첨지중추부사 임기진(林箕鎭)의 아들이다.
1846년(헌종 12) 식년시에 병과로 급제한 뒤 1848년 정언·교리·종부시정(宗簿寺正)을 지냈다. 1863년(철종 14) 경상감사 김흥근(金興根)이 철종에게 무례를 범했는데도 언관들이 논핵하지 않았다고 하여 지평 임한수 등을 유배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1864년(고종 1)에는 양주목사로 재임했을 때의 치적이 뛰어나 표창을 받았다.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군대를 이끌고 여현(礪峴)에 포진하였다.
1867년 선혜청에서 양주 대동에 상납분을 돈으로 바꿔 상납하도록 하고 독촉까지 했는데 임한수가 거행하지 않아 먼저 파직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고종은 양주는 능원(陵園)이 있는 곳이므로 스스로 응역(應役)하도록 하고, 임한수의 논죄는 그만두라는 교지를 내렸다. 이때 또 경기 암행어사의 보고에 따라 포상되었다.
1868년에 대사간과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874년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는 일본과 서계(書啓)와 관련한 문제를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대원군의 심복인 부산훈도 안동준(安東晙)을 조사하였다.
1875년 진하 겸 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의주부윤과 강원도관찰사로 있을 때는 일본인들이 울릉도에서 벌목하는 사실을 알아내어 조정에 보고하였다.
임오군란 후까지 강원도관찰사로 있다가 함경도관찰사로 전임되었다. 이때 청나라의 요청으로 토문강(土門江) 북안의 유민쇄환 조사, 혜산진 이설 등 변방 방비에 힘썼다. 함경도관찰사로 있으면서 함흥지방의 향권(鄕權) 다툼에 휘말려, 남병사 윤웅렬(尹雄烈)의 죄상을 보고한 일이 있었다.
조정에서 윤웅렬의 아들 윤치호(尹致昊)를 안무사(安撫使)로 파견하고 가도사(假都使)를 차하(差下)하는 등 사태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되자, 공무를 그만두고 직접 봉계(封啓)를 올리기 위해 잠행하다가 그 이유로 파직되었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