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해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서 『삼국사기』효소왕 6년(697)조는 “임해전에서 군신(群臣)에게 연회를 베풀었다.”고 하였다. 『동경잡기』에 의하면, “안압지 서쪽에 임해전이 있는데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이 기록을 토대로 할 때 안압지와 임해전이 비슷한 시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즉, 안압지는 674년(문무왕 14)에 축조되었으므로, 적어도 그 전후한 시기에 임해전도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안압지, 곧 월지(月池)가 있던 궁성은 태자가 거처하던 동궁(東宮)이 된다. 673년에 문무왕의 아우인 김인문(金仁問)이 임해군공(臨海郡公)의 작호를 지녔던 점을 생각할 때, 임해전은 곧 김인문의 처소이거나 본디 그와 관련된 건물이 아닌가 짐작된다.
왜냐 하면, 임해전이라는 동궁의 궁전 이름이 ‘임해군공’의 ‘임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임해전 역시 안압지가 축조된 674년을 전후한 어느 시기에 세워진 것이 분명하다.
임해전은 백제 의자왕 때 세워진 망해정(望海亭, 혹은 望海樓)에서 착상을 얻어 건립되었다고 한다. 그 성격은 임해전 앞에 있던 안압지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안압지에는 무산(巫山) 12봉(峯)을 본떠서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발굴결과 안압지에는 세 섬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곧 삼신산(三神山)을 상징한다. 삼신산은 신선이 살고 있다고 전하는 중국 바다의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州山)의 3산으로, 안압지가 단순한 못이 아니라 바다로 상징되었다는 증거가 된다.
이와 같이 안압지를 끼고 있는 임해전은 나라에 경사스런 일이 있을 때나 귀한 손님들이 왔을 때 군신들의 연회 및 귀빈의 접대장소로 이용되었다. 769년(혜공왕 5) 3월 이곳에서 왕이 베푼 연회가 있었고, 860년(헌안왕 4) 3월에는 경문왕(응렴)이 화랑으로 활동할 때 헌안왕이 이곳에서 베푼 잔치에 참석했다가 사위로 택해지기도 하였다.
또, 881년(헌강왕 7) 3월에는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향연을 베풀고서 흥에 겨워 직접 거문고를 탔고, 신하들은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놀았다고 한다. 신라가 망하기 직전인 931년(경순왕 5) 2월에는 경주를 방문한 고려태조를 이곳에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한편, 임해전은 867년(경문왕 7) 1월에 중수되었다. 이는 경문왕이 자신의 왕위에 도전하는 세력들의 반란을 진압한 뒤,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과시하기 위한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행해진 것이라 하겠다. 1970년대 중반에 발굴조사된 유적은 이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결과로 추측할 때 임해전은 남북축 약 280m, 동서축 200m에 독립건물 13동(棟), 회랑이 150칸이나 되는 아주 큰 규모였다. 그리고 신라 멸망시까지 왕실권위의 상징적 건물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현재는 당시 그 자리에 건물의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