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권 8책. 활자본. 아들 석찬(錫瓚)과 석관(錫瓘) 등이 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이응진(李應辰)의 발문이 있다. 규장각 도서·성암고서박물관과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1∼3에 시 354수, 권4∼13에 서(書) 366편, 권14에 서(序) 6편, 기(記) 16편, 발(跋) 6편, 권15에 제문 14편, 애사 1편, 축문 5편, 묘갈문 2편, 묘표 1편, 시장(諡狀) 1편, 권16에 소(疏) 2편, 잡저 12편, 부록으로 행장·묘갈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시체별로 분류되지 않았고, 대체로 저작 연대순으로 배열되었다. 「과삼탄(過三灘)」·「춘야유감(春夜有感)」·「강상만음(江上謾吟)」·「차공암팔영(次孔巖八詠)」·「석지정사28운(石芝精舍二十八韻)」등이 역작이다. 칠언율시가 대부분이며, 자신의 빈한하고 불우한 신세를 적절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의 시는 애써 고심하며 읊은 흔적이 많고, 독특한 풍취가 있다기보다는 무미건조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서(書)는 이 책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모두 130여 명에게 보낸 편지다. 스승인 홍직필(洪直弼)에게 보낸 편지는 스승을 받들어 그 뜻을 지키겠다는 다짐과 학문하는 방법, 예법에 대해 질문, 토론한 내용이 담겨 있다. 저자는 사서 외에 백가서(百家書)에도 두루 정통하였다. 『중용』과 『대학』에 더욱 공을 들여 늙도록 까지 매일 독송하였다고 한다. 특히, 예론에 조예가 깊었다.
잡저 가운데 「예설변(禮說辨)」은 당시 논란거리였던, 철종이 왕위에 오른 뒤의 헌종 등에 대한 칭호 문제를 해명한 것이다. 2,500여 자에 이르는 방대한 이 글은 저자의 예학의 깊이를 가늠케 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