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9월 고종이 부국강병책의 일환으로 농상(農桑)·직조(織造)·목축·지다(紙茶) 등의 분야에 관영회사를 설립하라는 지시를 내림으로써 설립되었다.
잠상공사에는 묄렌도르프(Mollendorf,P.G.)의 알선으로 상해에 거주하던 독일인 메르텐스(Maertens,A.H., 한국명 麥登司·麥登士)가 초빙되었는데, 여기에는 서양의 양잠기술을 들여와 국내에 보급, 양잠생산력을 높이려는 정부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메르텐스는 잠상공사 경리직(經理職)을 맡아 회사를 경영했는데, 이 때 그에게 지불된 봉급은 신금(薪金) 300원(元)이었다. 잠상공사는 상해에서 100만 그루의 뽕나무를 수입하여 인천·부평·서울에 심었다.
인천의 뽕나무밭은 그 곳 농민의 시기전(時起田)과 시장(柴場)을 사들인 것이며, 특히 서울의 뽕나무밭은 왕이 구궁(舊宮)의 정원을 할애하여 마련하였다. 왕실의 이와 같은 관심 속에서 정부는 뽕나무 재배비용 3만원, 메르텐스 봉급 2만 원 등 모두 5만 원을 잠상공사에 투자하였다.
한편, 메르텐스도 잠상공사 운영자금을 투자하였으며, 그 액수는 수천 달러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투자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투자한 것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889년 문을 닫았다.
한편, 잠상공사 설립계획은 수립되었으나 실행되지는 못하였으며, 이 때 설립된 것은 잠상공사가 아니라 메르텐스 개인이 경영했던 종상소(種桑所)라는 설도 있다. 이 설에 의하면, 앞에 서술한 잠상공사의 사업 내용도 실은 종상소의 사업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에서도 종상소의 설립 경영에는 정부의 지원이 있었다고 주장되고 있으므로, 기존의 설과 뚜렷한 차이는 설립 주체가 정부가 아닌 메르텐스 개인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