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최대의 군단인 6정(停)과 9서당(誓幢) 및 왕궁친위대인 시위부(侍衛府)에 배속된 최고지휘관으로, 6정의 예하부대에 18인, 9서당의 예하부대에 18인, 시위부에 6인, 모두 합해 42인을 두었다. 경덕왕 때 웅천주정(熊川州停)에 다시 3인을 더 두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는 일찍부터 장군직이 설치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신라의 영토확장전쟁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성립된 것으로 어떤 특정한 시대에 이르러 제도화된 것은 아닌 듯하다.
장군직은 원칙적으로 진골출신(眞骨出身)에 한하도록 되어 있으나, 보임관등에 있어서는 군단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즉, 9서당의 경우에는 이벌찬(伊伐飡)으로부터 급벌찬(級伐飡)까지로, 시위부는 아찬(阿飡)으로부터 급벌찬까지로, 그리고 6정은 상신(上臣)으로부터 상당(上堂)까지로 임명하게 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상신은 상대등(上大等)의 별칭으로 관등이름이 아닌 관직이름이며, 상당 역시 사천왕사성전(四天王寺成典) 이하 다섯 사찰의 성전 및 위화부(位和府)의 차관직명으로서, 모두 17관등과는 다른 계통의 것이다. 이 점에서 6정의 장군은 다른 군단의 장군에 비하여 오랜 전통을 유지해왔음을 알 수 있다. 화(花)는 대장군·상장군·하장군에 따라 각기 달랐다.
이상은 법제상의 장군직에 대한 설명이지만, 889년(진성여왕 3) 전국적인 농민반란이 일어난 뒤 후삼국시대의 동란기에 들어가면 지방사회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호족들이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성주(城主) 혹은 장군을 칭하는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