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천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정의부 제5중대원으로 활동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3년(고종 40)
사망 연도
1980년
출생지
평안북도 의주
정의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정의부 제5중대원으로 활동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평안북도 의주 출신. 1926년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에 가입하여 제5중대원이 되었다. 1927년 5중대 상등병으로서 중대장 김석하(金錫河)의 명령을 받아 홍학순(洪學淳)·이근수(李根秀)·김봉수(金鳳秀) 등과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왔다.

7월 15일 의주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일본 경찰의 밀정인 계승호(桂承浩)와 주민을 괴롭히는 악질 삼림간수 강영화(姜榮化)를 납치, 사형선고문을 낭독한 뒤 사살하였다. 8월 11일에는 의주군 수진면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 17일에는 수진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18일에는 4명의 독립군을 2명씩 2개 조로 나누어 1개 조는 식산은행 지점을, 다른 1개 조는 용만금융조합(龍灣金融組合)을 습격하게 하였다. 두 곳에서 수천 원의 현금을 빼앗은 뒤 시장으로 나와 군중들을 모아 놓고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연설을 한 뒤 군중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이때 일본 경찰이 추격하여 오자 총으로 쏘아 중상을 입힌 뒤 빼앗은 현금을 군중에게 뿌리고 그 혼란을 틈타 탈출하였다.

19일 일본 경찰의 경계망을 뚫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건너갔으나 그곳까지 추격해 온 일본 경찰대와 구련성(九連城)에서 40분간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다 봉황성 본부로 귀환 도중 최성준(崔成俊)과 함께 일본 경찰에 잡혔다. 1929년 9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10년 7개월 동안 복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기려수필(騎驢隨筆)』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유공자공훈록』4(국가보훈처, 1987)
『독립운동사자료집』1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독립운동사』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한국독립사』(김승학, 독립문화사, 1965)
『한국독립운동사』(애국동지원호회, 1956)
『동아일보(東亞日報)』
집필자
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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