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2년(헌덕왕 14) 3월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김헌창은 아버지 주원(周元)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신라 역사상 최대의 내란이었다. 국호를 ‘장안’으로 선포하고, 연호를 ‘경운(慶雲)’으로 하여 신라정부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독립국의 형태를 이루었다.
장안국의 세력권은 무진주(武珍州 : 지금의 光州)ㆍ완산주(完山州 : 지금의 전주)ㆍ청주(菁州 :경상남도 진주)ㆍ사벌주(沙伐州 :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에까지 미쳐 그 곳 도독들의 지지를 얻었다.
아울러 국원경(國原京 :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ㆍ서원경(西原京 :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ㆍ금관경(金官京 :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의 사신(仕臣)과 여러 군현의 수령들도 장안국의 세력권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중앙정부군은 수도의 팔방(八方)을 수비하는 한편 토벌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김헌창의 군대는 도동현(道冬峴)과 삼년산성(三年山城 : 지금의 충청북도 보은)ㆍ속리산 등지에서 거듭 패배하였다. 다시금 성주(星州)에서 패한 김헌창의 군대는 웅진성(熊津城 :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에서 항거하였다.
그러나 김헌창은 세의 불리함을 느껴 자결하고, 성도 함락되어 장안국은 멸망하였다. 한 때 신라 영역의 절반을 영향권하에 묶어 둘 정도로 위세를 보였으나, 수개월 존속한 단명한 왕조이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신라중앙권력이 약화되고 지방세력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