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사 ()

연극
단체
개화기에 잠시 존속했던 극장.
정의
개화기에 잠시 존속했던 극장.
연원 및 변천

장안사는 1908년에 이길선(李吉善)이 경성 중부 교동(校洞)에 건립하였고, 같은 해 7월경부터 공연을 가졌다. 이 극장은 당시의 다른 극장들처럼 자선공연을 많이 개최했다. 특히 1908년 7월 13일 경성고아원 건립비를 후원하기 위하여 관기(官妓) 100여명을 동원해서 관기자선연주회를 3일간 개최하였고, 그 수익금을 모두 경성고아원에 기부하였다. 또한 서부 방교(芳橋) 사립 동창학교(東彰學校)의 학교유지경비를 마련하고자 연주회를 개최하였다.

이 극장의 특이한 점은 1909년 4월 청나라의 연희(演戱)를 초청해서 공연을 가진 점이다. 청나라 배우 80여명이 초청되서 공연을 했는데, 안동현(安東縣)에서 가져온 의상이 볼 만했다. 그들의 연희형태는 주로 삼국지를 소재로 한 레퍼토리의 경극(京劇)이었다.

이후 이 극장은 청나라 공연으로 분노한 청년들의 경고(警告)와 일본 경시청(警視廳)의 탄압, 당시 경제사정에 따른 관객 감소 등으로 인하여 1909년 11월 초순에 문을 닫게 되었다. 그 후 잠시 다시 문을 열고 시대의 추세에 따라 활동사진 상영과 공연활동을 지속하였으나, 1910년 초여름 다시금 경영난 문제로 문을 닫게 되었다. 그 후 다시 문을 열고 극장을 운영하였는데, 두 번의 휴관 이후 관객이 오히려 증가하였다.

이 극장의 규모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당시 다른 극장들처럼 기존건물을 공연장으로 전환한 것이기 때문에 발전시설(發電施設) 등 내부구조가 허술하였다. 이로 인해 1908년 9월 10일 공연도중에 정전이 되어 표를 반환하는 사건이 있었고, 1909년 4월에는 구경 온 이탈리아영사의 딸이 층계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는 등 사고가 잦았다.

의의와 평가

장안사는 개화기의 대표적 극장인 원각사(圓覺社)나 광무대(光武臺)에 비하여 시설이 뒤떨어 지기는 하였으나, 7년여 동안 우리 고유의 전통연희를 공연한 전문극장이었다. 또한 자선공연을 주로 함으로써 시대의 요청에 대응하였고, 시대의 추세에 따른 연희공연과 활동사진 상영 등에 충실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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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皇城新聞)』(1909.4.18)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1909.4.16)
『한국 근대극장 변천사』(유민영, 태학사, 1998)
『한국 희곡사 연표』(민병욱, 1994, 국학자료원)
『근대한국공연예술사자료집 Ⅰ』(단국대학교출판부, 1984)
『한국극장사』(유민영, 한길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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