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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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도 / 안견
적벽도 / 안견
회화
작품
조선 초기 작자미상의 산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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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초기 작자미상의 산수화.
개설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로 그렸고, 크기는 세로 161.3㎝, 가로 102.3㎝이다.

북송의 소식(蘇軾)이 후베이성(湖北省) 후앙강현(黃岡縣)의 성 밖에 위치한 명승지인 적벽을 선유(船遊)하고 지은 「적벽부(赤壁賦)」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소식은 적벽을 임술년(壬戌年, 1082년) 음력 7월 16일과 3개월 뒤인 음력 10월 보름에 두 차례 선유하고 부(賦)를 지었다. 처음에 지은 것을 「적벽부」 또는 「전적벽부」라 하고, 두 번째의 것을 「후적벽부」라 한다. 소식의 적벽 선유를 주제로 한 적벽도는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종종 그려졌다. 대체로 「후적벽부」보다는 좀 더 낭만적인 분위기가 짙었던 「전적벽부」를 그림으로 표현했던 것 같다.

내용

적벽도는 중국에서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널리 퍼져 있던 소식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높은 평가를 반영한 것으로 믿어진다. 또한 그의 낭만적인 시 세계를 나타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전적벽부」에 의하면 1082년 7월 16일(음력) 소식은 손님들과 배를 타고 적벽 밑에서 놀았다. 이 때 청풍이 솔솔 불고 물은 잔잔하여 술을 마시면서 명월지시(明月之詩)를 읊었다고 한다. 손님 중에는 퉁소를 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뱃머리에 기대어 화답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술잔이 낭자하게 흩어질 정도로 통음하였다고 한다.

가을 경치를 배경으로 동파모(東坡帽)를 쓴 소식과 생황을 불거나 퉁소를 든 채 뱃전에 기대 앉아 있는 손님들이 술상을 앞에 놓고 낭만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는 모습, 그리고 술을 콸콸 따르는 동자 등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이 「적벽도」에 잘 묘사되어 있다. 「전적벽부」의 내용과 합치됨을 알 수 있다.

이 「적벽도(赤壁圖)」는 안견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산수의 화풍이 안견의 진작인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나 그의 전칭작인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등과 현저하게 다르다. 뿐만 아니라 산수화보다는 인물화에 보다 뛰어난 솜씨가 엿보여 산수화에 뛰어났던 안견과는 차이가 있다. 아마도 인물과 산수를 잘 그리면서도 산수화보다는 인물화에 더욱 뛰어났던 어떤 다른 화가의 작품일 것으로 믿어진다.

납작한 산들이 겹치듯 뒤로 물러나면서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반복적인 표현에 직업화가적인 취향이 강하게 배어 있다. 인물들은 기와 표정이 살아 있으며, 옷주름이 변화 있는 선들로 개성 있게 묘사되어 있어 뛰어난 인물 묘사의 솜씨가 잘 드러나 있다. 편파 구도(偏頗構圖)와 확대된 공간 표현에는 어느 정도 안견파의 전통이 엿보이지만, 산 표현이나 수지법(樹枝法) 등에서 명대 절파화풍(浙派畵風)의 영향이 감지되어 주목된다.

참고문헌

「속전 안견필 적벽도고구」(안휘준, 『홍익미술』3, 홍익대학교 홍익미술편찬위원회, 1974)
『蘇東坡全集』(臺灣 : 世界書局,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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