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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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무
전경무
체육
인물
해방 이후 올림픽대책위원회의 부위원장을 역임한 체육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0년(고종 37)
사망 연도
1947년
출생지
평안북도 곽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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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해방 이후 올림픽대책위원회의 부위원장을 역임한 체육인.
내용

?∼1947. 평안북도 곽산 출생. 4살 때 부모와 같이 하와이로 건너가 그곳에서 중학교까지 마치고 시카고 미시간대학 정치학부를 졸업하였다. 학창시절에 미식축구선수 및 웅변부장으로 활동한 바 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워싱턴에서 조선독립운동을 위하여 싸웠다.

광복되던 해인 1945년 11월 귀국한 뒤 올림픽대책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서 우리나라의 올림픽 참가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당시 조선체육회는 1946년 7월 올림픽대책위원회를 체육회내에 설치하고 위원장에는 체육회 부회장인 유억겸(兪億兼)이, 부회장에는 전경무와 이상백(李相佰)이 맡아 그 준비사무를 보았다.

한편, 전경무는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장인 브런디지(Brundage, A.)를 만나 우리나라의 올림픽 참가를 위한 협조요청에 승낙을 얻고 돌아오는 등 올림픽 참가 준비 작업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47년 6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개최되는 제40차 IOC총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5월 29일 김포비행장에서 미군수송기(C54호)에 탑승해 일본 도쿄로 가던 도중 아츠키(厚木)의 산악지대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순직했다.

그의 체육장(體育葬)은 1947년 6월 18일 서울운동장에서 체육회장 여운형(呂運亨), 부회장 유억겸, 민정장관 안재홍(安在鴻) 등과 주한미군사령관 하지중장, 군정장관 아놀드 등 미군 수뇌부가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으며, 올림픽후원회는 고인을 추모하는 뜻에서 올림픽 파견비용 조달을 위한 복권발매를 고인의 사진을 넣어서 실시하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체육한국인』(체육부, 1986)
『대한체육회사』(대한체육회, 1965)
『동아일보』 (194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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