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2월 9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고도 하며, 김유신(金庾信)의 증조부이다. 521년가야의 마지막 왕이 되어 532년신라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구형왕릉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이 돌무덤은 그 형식에 있어 일반 분묘들과 달리 각 층이 단을 이루고 있는 방형으로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내리는 경사면에 잡석으로 축조하였다. 전면은 7단을 이루고 있으나 후면은 갈수록 경사가 커져서 각 층의 등급의 높이 에 따라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석렬은 전면에서조차 직선이 아닌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모퉁이도 뚜렷하지 않고 정상은 봉분과 같이 타원의 반구형을 이루고 있다.
전면 중앙에서의 높이는 7.15m이고 무엇을 위한 시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제4단의 동쪽에 폭 0.4m, 높이 0.4m, 깊이 0.68m의 감실이 설치되어 있다. 이 돌무덤을 중심으로 같은 잡석으로 높이 1m 내외의 담을 쌓고 전면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 새겨진 비석이 서 있으며 그 앞에 상석(床石)과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석수(石獸)가 각각 1쌍씩 있으나 이 석물들은 최근의 시설물들로 돌무덤과는 시대적인 차이가 많다.
그런데 이 돌무덤을 둘러싸고 종래에는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두 설이 제기 되어 왔다. 먼저 이것을 석탑이라고 보는 것은 이와 같은 형태의 유구가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되어 있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것을 왕릉이라고 하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권31, 산음현(山陰縣) 산천조(山川條)에 “왕산(王山)”이 있고 그 각주(脚註)에 “현(縣)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릉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이 구형왕릉이라고 왕명(王名)을 붙인 기록은 홍의영(洪儀永, 1750∼1815)의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 비로소 보이고 있다.
여기서 이 돌무덤에 대해 설명하고 근처에 있는 왕산사(王山寺)에 전해져 오고 있는 『산사기권(山寺記卷)』에 구형왕릉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하였다. 한편 『산청현읍지(山淸縣邑誌)』에 의하면 정조 22 년(1798)에 처음으로 왕릉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홍의영의 『왕산심릉기』도 이 “왕릉이 처음 나타났다”고 하는데 일익을 담당한 것으로 보여진다.
왕산사는 없어지고, 다만 이 무덤을 위한 재실(齋室)이 있어 여기에 있는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목궤 속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 · 옷, 그리고 활과 칼 등의 유물이 나왔다는 것이다. 구형왕의 후손들이 1793년 덕양전(德讓殿)을 세워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