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은 2인이며, 565년(진흥왕 26)에 집사부(執事部)의 전신인 품주(稟主)의 장관직으로 설치되어 651년(진덕여왕 5)에 품주가 집사부로 확대 개편될 때, 중시(中侍) 아래 차관직으로 떨어졌다.
그 뒤 747년(경덕왕 6)에 시랑(侍郎)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다만 이보다 30여 년 앞선 금석문자료인 김지성(金志誠)이 만든 감산사미륵보살(甘山寺彌勒菩薩) 및 아미타여래조상기(阿彌陀如來造像記)에 시랑의 명칭이 보이고 있어 651년 중시가 설치될 때 개명된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취임할 수 있는 관등은 아찬(阿飡)에서 나마(奈麻)까지로 되어 있어 6두품이 차지할 수 있는 최고관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시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