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백영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첨서승추부사 · 지의정부사 · 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시호
문평(文平)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412년 10월 26일
본관
경산(慶山)
주요 관직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 경기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조선 전기에 첨서승추부사 · 지의정부사 · 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생애 및 활동사항

본관은 경산(慶山). 공민왕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375년(우왕 1) 간관으로서 우헌납 이첨(李詹)과 더불어 재상 이인임(李仁任)의 죄를 탄핵하고 처형을 요청하였다가 도리어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좌천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1392년 조선 개국 이후 간의(諫議)를 역임하였고, 1397년(태조 6) 병조전서로서 서북면선위사에 임명되어 축성에 적당한 곳을 찾아나섰다.

이듬해 풍해도도관찰출척사(豊海道都觀察黜陟使), 1399년(정종 1) 대사헌, 다음해에는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거치면서 불교가 인의(仁義)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니 왕이 이를 좋아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1401년(태종 1) 노비변정도감제조(奴婢辨正都監提調) · 경상도도관찰출척사, 1404년 승녕부윤(承寧府尹)을 지내고, 이 해 첨서승추부사(簽書承樞府事)로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가 되었다.

1406년 2월과 1412년 1월에 거듭 경기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를 역임하고, 걸해(乞骸)하여 경산현(慶山縣)에 물러가 지내다가 1412년 10월 26일 사망하였다. 경상도 도관찰사에게 명하여 치제(致祭)하게 하고, ‘문평(文平)’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려 주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실록(太祖實錄)』
『정종실록(定宗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