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당시의 전정고취는 그림과 같이 진열되었으며, 악사(樂師) 2명과 악공(樂工) 50명으로 구성되었다.
전정고취가 연주된 경우는 매달 5일에 임금이 친히 문무백관을 만나보던 조참(朝參) 때, 임금이 몸소 참석하여 급제한 사람에게 차례를 정하는 시험인 문과전시(文科殿試) 때, 생원이나 진사로 급제한 사람에게 백패(白牌)를 주고 주과(酒果)를 베푼 방방(放榜) 때, 임금이 중국 황제에게 보낼 표문(表文)이나 전문(箋文)을 사신에게 전하여 보내는 의식인 배표(拜表)와 배전(拜箋)의 권정례(權停禮) 등의 경우였다.
위와 같은 전정고취의 악기 편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축소되는 등의 변천 과정을 거치게 되었으니, 첫째로 향비파·가얏고·거문고·대쟁·아쟁·월금같은 현악기가 악기 편성에서 제외되는 변천을 거치게 되었고, 둘째로 대고(大鼓)나 교방고(敎坊鼓)로 대치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전정고취의 악현(樂懸)이 축소되면서 관악기 위주의 편성으로 변천된 사실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