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당시의 위치는 현재 경기전(慶基殿) 근처였으나 태조(太祖) 이성계의 수용(晬容)을 봉안하기 위하여 경기전이 준공되자 1410년(태종 10)전주성의 서쪽 황화대(黃華臺) 아래로 이전하였다.
그 뒤 1603년(선조 36) 순찰사 장만(張晩)이 좌사우묘지제(左社右廟之制)에 어긋난다 하여 조정에 보고, 왕의 재가를 받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1654년(효종 5) · 1832년(순조 32) · 1879년(고종 16) · 1904년에 중수하였고, 1922년에 명륜당을 보수하였다.
조선 후기의 경내 건물로는 3칸의 대성전, 각 10칸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신문(神門), 외문(外門), 만화루(萬化樓), 5칸의 명륜당, 각 6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3칸의 계성사(啓聖祠), 신문(神門), 입덕문(入德門), 4칸의 사마재(司馬齋), 6칸의 양사재(養士齋), 2칸의 책판고(冊板庫), 직원실, 제기고(祭器庫), 수복실 등 총 99칸인 대규모의 건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향교는 전라도 53관의 수도향교(首都鄕校)라 칭하였다.
그 뒤 만화루는 1886년(고종 23)에 홍수로 수몰되었고, 책판고는 관찰사 조한국(趙翰國)이 관고(官庫) 소유 책판을 전주향교로 이장하여 책판고 내에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1920년의 홍수와 1950년 6 · 25전쟁으로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이 향교의 대성전은 1971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현,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으며, 5성(五聖) · 10철(十哲) · 송조 6현(宋朝六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또 동무 · 서무에는 유약(有若) · 복불제(宓不齊) · 복승(伏勝) · 동중서(董仲舒) · 한유(韓愈) · 이통(李侗)과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대성전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정면 3칸에는 널문을 달았으며, 도리기둥에 맞배지붕이고, 양합각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좌우 1칸씩은 눈썹지붕을 이어 달아 꾸몄으며, 전면에는 모두 널문을 달았다. 따라서 눈썹지붕의 도리가 뺄목으로 되어 길게 뻗어 나와 있는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 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9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 · 가을에 석전(釋奠: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 ·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소장 전적으로는 판본 67종 93책, 사본 32종 51책의 총 99종 144책이 있다. 현재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