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충주의 ()

목차
현대문학
개념
계급주의 문학론과 민족주의 문학론의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제기된 중도적 문학론.
목차
정의
계급주의 문학론과 민족주의 문학론의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제기된 중도적 문학론.
내용

프로문학(프롤레타리아문학)의 활동이 1926년에 이르러 전 문단을 장악하자, 종래의 기성 문인들이 국민문학(國民文學)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프로문학과 적극적인 대결을 시작하였다.

국민문학은 이념과 형식에 있어서 외래적인 것을 거부하고 조선적인 것을 수호하고 존중하자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즉, 일종의 민족주의 문학의 변종이었다.

특히, 최남선(崔南善)은 조선주의와 시조부흥운동으로 국민문학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국민문학은 계급제일주의에 대한 민족제일주의, 사상제일주의에 대한 문학제일주의를 주장함에 따라 보수적 민족주의 경향을 노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민문학론자들은 이론적 입지를 점차 중립적으로 변경시키게 되었다. 이 결과 『문예공론(文藝公論)』을 중심으로 양주동(梁柱東)·염상섭(廉想涉) 등이 심화시킨 절충주의 문학론이 성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절충주의는 국민문학론의 보수성을 반성하고 프로문학의 계급성을 수용한 타협적인 조화주의였다.

이와 같이 프로문학과 민족문학의 타협을 모색한 문학자들을 광의의 절충파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는 김영진(金永鎭)·김팔봉(金八峯)·김화산(金華山)·염상섭·양주동·이향(李鄕)·정노풍(鄭蘆風) 등이 있다.

그러나 협의의 절충주의는 프로문학과 민족문학의 융합보다는 프로문학을 비판하는 측면이 강한 양주동·염상섭의 논의를 말한다.

양주동의 절충주의는 「문예비평가의 태도 기타(文藝批評家의 態度 其他)」(東亞日報, 1927.2.28.)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김팔봉·박영희(朴英熙)의 형식·내용 논쟁의 경과를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프로문학의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써 민족주의 문학의 당위를 주창한 것이다.

박영희의 형식(표현) 무시를 문예가 아닌 삐라(선전문)라고 공격하고, 김팔봉은 문학의 내재적인 것을 종으로 전락시켜 본말을 전도시켰다고 비판하면서 양자의 중간단계인 이원론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그의 절충주의가 심화, 체계화된 것은 「다시 문예비평(文藝批評)의 태도(態度)에 취(就)하야」(東亞日報, 1927.10.12.)·「문단 삼분야 文壇三分野」(新民, 1927.4.) 등의 글에서였다.

이 글들에서 그는 문단을 순수문학파(정통파), 순수사회파(반동파), 중간파로 나누고, 중간파를 다시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분류는 재단적이며 구체성을 획득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양주동은 자칭 우익중간파로서 절충주의의 정당성을 소리 높여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양주동의 절충주의는 곧바로 프로문학의 공격을 받았다. 프로문학 측에서는 절충주의의 본질이 민족주의와 형식주의임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김팔봉이 「조선문예변천과정(朝鮮文藝變遷過程)」(朝鮮思想通信 第37輯, 1929.5.28.)에서 “양(梁)씨의 최대의 탄환은 ‘무산자작가의 소설은 소설이 아니다. 그들은 표현을 모른다.’이다.”라고 반론한 것도 절충주의의 맹점을 파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프로문학을 비판하면서도 민족문학과 절충을 내세운 또 다른 문학가가 염상섭이다. 그는 국민문학건설을 우리 문예운동의 제일 과제로 보았고, 프로문학을 국민문학 속에 포함된 시대적 요소로 보는 양주동과는 다르게 국민문학과 프로문학의 대립을 필연적이라고 인정하면서 양자의 충돌점과 타협점을 병행시키려는 입장을 취하였다.

「조선문예(朝鮮文藝)의 현재(現在)와 장래(將來)」(新民, 1927.1.), 「반동전통문학(反動傳統文學)의 관계(關係)」(朝鮮日報, 1927.1.15.) 등의 글에서 염상섭은 양자의 절충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농민문학을 내세운다.

“민족적 전통이 흙에서 나오고 조선노동운동의 본무대가 농촌의 소작운동에 있는 것”이므로 양자의 공통 기반이 바로 농민문학에 있다는 것이다. 염상섭의 이러한 논리는 정당한 것이었으나 구체적인 창작 방법론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절충주의는 당시 이념적인 분열 상황을 극복하려는 당위성을 가지고 주장되었으나 구체성이 빈약하여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또한, 절충주의가 국민문학의 변종이었으므로 반계급문학을 본질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양자의 절충이라는 주장은 전술적인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의 특수성을 지키려 하였던 점은 프로문학의 경직성에 자극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1930년대의 순수문학론에 어느 정도 기틀을 마련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근대문예비평사』(김윤식, 일지사, 1976)
『문예사조』(박철희 편, 이우출판사, 1985)
집필자
윤홍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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