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수백(壽伯), 호는 제곡(濟谷). 정복겸(鄭福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유길(鄭惟吉)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정창연(鄭昌衍)이며, 어머니는 한세건(韓世建)의 딸이다. 참판 정광경(鄭廣敬)의 형이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아버지이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03년(선조 3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대교 등을 거쳐, 1605년 이후 정자(正字)·수찬(修撰)·교리(校理)·지평(持平) 등 초년에 주로 삼사의 현직(顯職)을 역임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대비삭호문제(大妃削號問題)와 아울러 재차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부친 창연의 정청불참문제(庭請不參問題)로 인하여 탄핵을 받았으나 계속 등용되어 형조참의·우승지·남양부사·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낸 다음, 병자호란 후 벼슬에 뜻을 버리고 향리에 물러가 있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형조판서에 오른 뒤 부호군을 거쳐 지돈녕부사가 되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