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중상(仲常), 호는 설학재(雪壑齋). 아버지는 감찰대부(監察大夫) 정양생(鄭良生)이다.
1377년(우왕 3) 문과에 급제, 전교시부령(典校寺副令)을 역임했다. 1382년김극공(金克恭)의 옥사에 연루, 유배되었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한성부우윤을 지내고 1394년(태조 3) 왕명으로 한리(韓理)·조서(曺庶)·권홍(權弘)·변혼(卞渾) 등과 함께 『법화경』 4부를 금니(金泥)로 썼다.
1397년 좌간의대부, 이듬해 정안군(靖安君: 태종)의 막료로서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 겸 상서원소윤(尙瑞院少尹)에 이어 승지 겸 상서원윤을 지냈다. 정종 때 도승지·대사헌, 태종 때 예문관학사를 거쳐 중군총제(中軍摠制)·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공조판서·호조 판서·판한성부사·계림부윤·개성부유후 등을 역임하였다.
1417년(태종 17) 의정부참찬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건너가 홍무연간(洪武年間: 明太祖時代)에 만든 각궁(角弓)을 구입하여 왔고, 그 뒤 의정부찬성이 되었으나 풍질로 사직하였다. 예서·초서·전서를 잘 써 이름이 높았고, 성품은 청렴하였으며 예의가 발랐다.
경기도 양주에 있는 건원릉신도비(健元陵神道碑)의 제액(題額)을 썼다. 시호는 정절(靖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