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9년(선조 22)에 비변사에서 무신들을 불차녹용(不次錄用)할 때 관찰사 강섬(姜暹)의 천거를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사천현감으로 왜적 1만여명이 세 길로 나누어 진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경상우병사 유숭인(柳崇仁)의 선봉이 되었다.
유숭인이 전쟁에 패하여 진주성에 들어가 지키기를 원하였으나 판관 김시민(金時敏)은 받아들이지 않고 밖에서 응원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응원하기 위하여 성에서 돌아 나오다 적을 만나 접전, 유숭인이 먼저 전사하고 그도 흩어진 병졸들을 모아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739년(영조 15)에 유학 유상화(柳相華) 등 수백명이 그를 임진왜란 때 역전사(力戰死)한 공로자로, 그의 아들 정택뢰(鄭澤雷)도 광해군 때 폐모론을 공박한 공로자로 증관사시(贈官賜諡)할 것을 상소하여 그는 훈련정에, 아들 정택뢰는 지평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