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계통(季通), 호는 한천(寒泉).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정차징(鄭次徵)이며, 어머니는 진주 강씨(晉州姜氏)로 부호군 강사일(姜泗逸)의 딸이다. 4남 중 막내이며 시인 정내교(鄭來僑)의 동생이다.
어렸을 때에는 형 정내교에게서 글을 배웠다. 8세 때에는 "구름 다하니 청산이 보이네(雲盡見靑山)"라는 시를 지어 사람을 놀라게 했다. 한때 배천으로 가 학업에 열중했으며, 29세 때인 1725년(영조 1)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곧 그만두고 여항시인(閭巷詩人)으로 행세했다.
형을 이어 홍세태(洪世泰)의 문하로 들어갔는데 시에 재능이 뛰어나 당시 여항·사대부 사이에서 시로 이름이 있었다. 집이 가난해 전라도의 한천(寒泉)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한천이라는 호를 가지게 됐다.
백성들의 생활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와 관련된 시작품을 많이 지었다. 한편, 관서지방(평안도와 황해도 북부 지역)의 안찰사 밑에서 세금을 걷는 일을 한 적이 있는데, 가난한 백성들에게 차마 세금을 내라고 할 수 없어 빈손으로 돌아오건 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평생 높은 관직에 오른 적은 없고 다만 기실(記室)을 지낸 것이 고작이다.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한 홍석보(洪錫輔)는 그를 서기(書記)로 삼아 가까이 했으며, 영남백(嶺南伯)이었던 조현명(趙顯命)은 그를 객사에 머무르게 하고 함께 시를 수창하는 한편 자제교육을 맡기기도 했다.
정민교는 조현명의 객사에서 학질을 앓다가 35세로 요절했다. 시의 재능뿐 아니라 효행으로도 알려졌던 그가 죽자 선비들은 가사(佳士 : 뛰어난 선비)가 죽었다며 애석해 했다고 한다.
저서로 『한천유고(寒泉遺稿)』 2권 1책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