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월리고분군의 중앙부를 정선선 철도와 정선읍과 사북을 잇는 424번 지방도가 관통하고 있다. 이곳에는 많은 고분들이 분포하였으나 철도와 도로의 개설로 많이 파괴되었고, 1990년 남아 있던 12기의 고분이 강원대학교박물관에 의해서 발굴 조사되었다. 조사된 고분들은 대부분 이미 도굴의 피해를 입어 파괴됨으로써 그 구조와 매납유물의 원상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남아 있는 유구의 흔적으로 보아 고분의 묘제는 구덩식돌덧널[竪穴式石槨], 앞트기식돌덧널[橫口式石槨], 앞트기식돌방[橫口式石室] 등으로 판단되는데, 비교적 잘 남아 있던 2기(10 · 11호)에 대한 조사내용은 다음과 같다.
10호는 무덤구덩이를 파고 깬돌[割石]을 5∼6단 높이로 쌓은 위에 뚜껑돌을 덮은 돌덧널무덤으로, 양 단벽이 많이 무너져 있어 잘 알 수 없으나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들로 보아 앞트기식돌덧널무덤으로 추정된다. 남아 있는 봉분은 남북 7.4m, 동서 3.5m의 크기였고 돌덧널의 크기는 길이 3.2m, 너비 1.2m였다. 내부에서는 2구체의 인골편과 함께 토기 9점, 금동귀고리[金銅耳飾] 1쌍, 손칼[刀子] 1점, 쇠낫[鐵鎌] 1점, 쇠화살촉[鐵鏃] 4점, 가락바퀴[紡錘車] 1점이 출토되었다.
11호는 북서-남동 방향의 무덤구덩이를 파고 깬돌을 쌓아 석벽을 구축하고 뚜껑돌을 덮은 돌덧널무덤으로 조사되었으나, 무덤의 평면형태, 주검받침대[屍床臺]의 배치형태 등으로 보아 남동쪽에 입구를 둔 앞트기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 돌방은 방형(方形)으로 너비는 2.1m이나 길이는 알 수 없다. 돌방의 내부 후벽(後壁)인 북서단벽에 붙여 잔자갈을 깔아 주검받침[屍床]을 마련하였고, 동북장벽에 덧붙여서는 넓적한 판석을 깔아 또 하나의 주검받침을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교란되어 원상을 찾기 힘들다. 내부에서는 1구체의 소뼈가 출토되었다.
출토된 토기가 6세기 후반∼7세기의 신라토기인 점으로 미루어 이 고분들은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후에 축조된 신라의 고분들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