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서주(瑞州: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 인주(麟州: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의 수령을 지낸 정신보(鄭臣保)의 아들이다.
처음 몽고어 통역관으로 출발했으나 고종 말 몽고병의 침입 때 종군해 야습으로 전공을 세워 제교(諸校)에 보임되었다.
1269년(원종 10) 세자(뒤의 충렬왕)가 원나라에 갈 때 시종하였다. 세자가 돌아오다가 파사부(婆娑府)에 이르렀을 때, 임연(林衍)의 변(變)을 고하는 자가 있어 인주의 수령으로 있던 아버지에게 이를 알려 세자를 다시 원나라로 되돌아가게 하였다.
이 공으로 1274년(충렬왕 1) 시종일등공신(侍從一等功臣: 高麗史 정인경열전에는 2등공신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에서는 세가의 기록을 따름.)에 올랐다. 또한 고향인 부성현(富城縣)이 서산군(瑞山郡)으로 승격되었다.
1279년 장군으로 원나라에 가서 일본 원정준비에 홍다구(洪茶丘)가 간섭하지 못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1282년 친종장군(親從將軍)으로서 요동(遼東)·심양(瀋陽)에 가서, 이듬해에는 대장군으로 요양(遼陽)·북경(北京)에 가서 유민(流民)들을 추쇄(推刷)해 왔다. 1288년 상장군에 올랐다.
1290년 동녕부(東寧府)를 고려에 귀속시키는 데 공을 세워 부지밀직(副知密直)에 오르고,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로서 서경유수(西京留守)가 되었다. 1292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랐으나 나라에서 혼인을 금하는 기간을 어겨 섬에 유배되었다.
1299년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어 정조사(正朝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거쳐 중찬(中贊)으로 치사했으며, 벽상삼한삼중대광 추성정책안사공신(壁上三韓三重大匡推誠定策安社功臣)의 호를 받았다.
성품이 정직하고 몽고어에 능해 통역관으로 이름이 알려져 원나라로부터 무덕장군 정동성이문관(武德將軍征東省理問官)에 임명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