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종이 바탕에 수묵으로 그렸고, 크기는 세로 86.5㎝, 가로 51.3㎝이다. 같은 해 보물로 지정된 「정조 필 파초도(正祖 筆 芭蕉圖)」와 쌍폭[對聯]으로 간주된다. 이 둘은 여러 폭으로 된 병풍에서 떨어져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정조는 시(詩)·서(書)·화(畵)에 두루 능했던 조선 22대 왕이다. 정조연간은 사회·경제·문화의 발전이 크게 진작되어 여러 문인화가 및 뛰어난 화원(畵員)들의 활동이 두드러져 화단이 자못 융성한 때였다. 정조 자신도 묵희(墨戱)를 즐겼다.
현재 전하는 정조의 그림으로는 서울대학교에 소장된 대폭의 「묵매(墨梅)」,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전칭작인 「니금사군자병(泥金四君子屛)」, 1987년 일본 야마토분카간[大和文華館]에서 개최된 조선의 병풍 특별전에 출품된 「군자화목도병풍 君子花木圖屛風)」등이 있다.
국화는 서기전 중국의 고전인『초사(楚史)』, 『예기(禮記)』 등에 이미 언급된 바, 특히 동진(東晋)의 전원시인 도잠(陶潛)의 시 「음주(飮酒)」이래로 줄기차게 시인묵객들에게 상찬받은 꽃이다. 그림으로는 당나라에서 화조화(花鳥畵)의 소재로 다른 여러 꽃들과 함께 그려졌고, 마침내 사군자(四君子)에 포함되면서 독립된 화목(畵目)으로 성장하였다. 국화를 수묵만으로 전문적으로 그린 화가가 등장한 것은 송나라 이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국화를 재배하였고 중국이나 일본에 신라국(新羅菊)·백제국(百濟菊)을 전해 주기도 하였다. 당시의 그림은 전하지 않지만, 대체로 중국과 같은 양상으로 국화가 그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상감청자나 조선시대 분청사기에 들국화[野菊]가 주문양(主文樣)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또 조선 초기의 청화백자나 산수화에 부분적으로 국화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묵국(墨菊)으로서는 이산해(李山海) 필로 전해지는 개인 소장품 한 폭과 17세기 중엽에 활동한 홍진구(洪晋龜) 등이 그린 소폭이 확인될 뿐이다.
매화나 대나무가 조선 중기 화단에서 조선적인 정형(定型)을 이루는 양상과 달리 국화는 오히려 난초보다도 늦게 그려진 듯하다. 즉 18세기 이후 조선 후기 및 말기 화단에서 근대로 이르면서 크게 성하였다. 18세기에 문인화가 이인상(李麟祥)의 「병국도(病菊圖)」, 강세황(姜世晃)의 「사군자(四君子)」와 「국충도(菊蟲圖)」 등이 정조에 앞서 그려진 그림들이다. 특히 강세황의 경우 그림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초충이 함께 그려졌으며 괴석(怪石)이 등장하는 등 정조의 「국화도」와 공통점이 보인다.
들국화로 보이는 정조의 「국화도」는 좌측에 화면의 무게를 두어 바위와 잡풀을 나타내었다. 중앙부에는 세로로 길게 국화를 포치하였다. 화면에 넓은 여백을 많이 두고 먹의 농담 대조로 꽃잎과 꽃을 구별하였다. 활달하고 힘찬 필치로 용필(用筆)의 속도감이 느껴진다. 서투른 듯 꾸밈없는 표현에서 문기(文氣)와 화격(畵格)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국화에 괴석을 곁들인 일반적인 양식은 말기 화단으로 이어진다. 허련(許鍊)·허형(許瀅) 부자와 김수철(金秀哲), 신명연(申命衍) 등의 작품 외에 도식화된 청화백자의 문양으로 쓰였음이 확인된다. 아울러 야마토분카간[大和文華館]에서 출품된 병풍의 예와 같이 국화 한 가지만이 아닌 사군자 및 연(蓮), 오동(梧桐), 모란(牡丹), 파초, 소나무[松], 포도(葡萄) 등과 함께 6폭 또는 8폭 이상의 병풍으로 일괄하여 그려지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