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사조(士朝), 호는 화곡(華谷)·벽은(薜隱). 정위(鄭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유침(鄭惟沉)이고, 아버지는 좌의정인성부원군(左議政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이다. 어머니는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유강정(柳强頂)의 딸이다. 형조참의 홍인걸(洪仁傑)의 사위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2년 7월 의주행재소에서 실시된 별시문과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에 초수(超授)되고 곧이어 예조좌랑에 개수(改授)되었다. 1594년에 전년에 동인의 모함으로 강화에 퇴거했다가 죽은 아버지의 죄를 추론하면서 관작을 추탈하자 이에 항변하다가 삭출되었다.
이후 인조가 즉위하기까지 20여 년에 걸쳐 아버지에 대한 선조의 혐오와 동인과 대북의 박해 및 성혼을 극력으로 배척한 정인홍(鄭仁弘)의 집요한 음모 등으로 사환(仕宦)이 금지당함은 물론, 생명이 위협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1623년(인조 1) 3월 인조의 즉위와 서인의 집권으로 성균관직강으로 복직되고, 이듬해 3월 사간원사간 겸 춘추관편수관(司諫院司諫兼春秋館編修官)을 거쳐 곧 사도시정(司䆃寺正)에 개수되었다.
1624년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재직할 때 동생 홍문관교리 궁명(弓溟)과 함께 아버지가 죄를 입게 된 것은 1589년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를 다스리면서 동인을 배척했기 때문이니 관작을 복구해 달라고 간청, 아버지의 관작을 복구시켰다. 그리고 그 해 7월 사헌부집의·사간원사간·사복시정을 역임하였다.
1625년 의정부검상·의정부사인·홍문관교리·세자시강원보덕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하면서 강릉대도호부사로 파견되었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저작으로 『송강유고(松江遺稿)』의 부록에 실려 있는 『백씨유고(伯氏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