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정태(鄭泰). 일명 태용(泰鎔). 본관은 해주(海州). 경상남도 진양(지금의 진주) 출신.
진주농업고등학교를 거쳐, 1943년 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 불교과를 졸업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 진양 군청에서 서기로 근무한 바 있고, 한국전쟁 때는 부산으로 피난하여 교사·신문기자 등을 지냈다. 그 뒤 1956년 상경하여 동국대학교신문사 주간을 지내기도 하였다.
진주농업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조연현(趙演鉉)과 가까이 사귀어 함께 ‘시림(詩林)’ 동인으로 참여하여, 1939년 『시림』 창간호에 시 「무등(無燈)의 터널」과 「요렇게 사는 마음은 어디서 왔느뇨?」(시림, 3호)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전개하였다.
평론 활동은 광복 후 조연현이 주재한 『예술부락(藝術部落)』지의 동인이 되어 「문학의 대중성」을 발표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1957년 3월부터 1958년 1월까지 『현대문학(現代文學)』지에 「현대시인연구」를 연재하여 최남선(崔南善)을 비롯한 주요 시인들의 작품세계를 조명하였다.
그 뒤 1970년대에 이 작업을 재개하여 총 30여 편에 달하는 시인론을 쓰기도 하였다. 6·25 전까지의 비평은 문학의 사회성을 강조하는 편이었으나, 그 이후부터는 인생론적 의의를 추구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하여 관념보다는 직관, 체계적 이론보다는 온건한 상식을 비평의 기조로 삼았으며, 비평이란 본질적으로 시나 소설과 같은 창작이며 그 창작은 또한 비평 행위라고 규정하였다.
다만, 전자는 논리로 비평하는 데 반하여 후자는 형상(形象)으로 비평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비평은 이와 같은 논리성 때문에 입법 행위로 이어지는 문학의 학문화를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시에 관하여는 감동의 질서화가 시의 본질이라 말하고, 그 방법론으로서 심상(心象)의 중시와 난해성의 극복이 요청된다고 주장하였다. 이 밖에도 소설 및 문학 일반에 관하여 약 20년간에 다수의 평론을 써왔으나 생전에는 저서를 간행하지 못하였고, 죽은 뒤 조연현의 주선으로 『한국현대시인연구·기타』(1976)가 나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