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중욱(仲旭), 호는 퇴성헌(退省軒).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정하주(鄭廈柱)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사헌부감찰 김윤중(金胤重)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종조(從祖)인 수석(洙碩)에게 수학하였다.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 주위로부터 큰 기대를 모았으며, 영의정 이여(李畲)에게 학문이 높다는 칭찬을 받은 일도 있었다.
1715년(숙종 41) 진사시에, 1725년(영조 1)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고, 내섬시직장(內贍寺直長)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전적으로 승진되고 이어 병조좌랑으로 옮겼으며, 1727년 평강현령으로 나가 3년 동안 치적을 쌓았다. 1729년 아버지 상을 당해 고향에 돌아갔다가 삼년상을 마친 뒤 1732년에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다.
이 해 전국적으로 흉년이 들었는데, 정부의 구황 정책(救荒政策)이 삼남에만 치우치고 강원도와 경기도 일원에는 아무런 조처가 없음을 지적, 이의 시정을 간하는 소를 올려 왕의 하답을 얻었다.
1733년 사간원정언이 되고, 병조정랑을 거쳐 평안도도사로 부임, 청나라를 내왕하는 사람들에 대한 검색을 맡아 보았다. 1734년 사간원사간, 이듬해 사헌부집의, 1739년 시강원보덕 등을 역임하였다. 1741년 다시 사간이 되었는데, 당시 왕실의 외손이었던 원경하(元景夏)와 의견 충돌이 생겨 권력층으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었다.
이후 여러 한직을 거치다가 1747년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다시 원경하의 무고로 사직하였다. 1750년 황주문안사에 임명되고, 조사오위장(曹司五衛將)·병조참지 등을 거쳐 해미현감으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였다. 1755년 의주문안사에 다시 임명되었으나, 원경하 일당의 모함을 받아 삼척으로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사장(詞章)에 뛰어나 조하망(曺夏望)·강박(姜樸) 등과 함께 교우 관계를 맺고 문명을 크게 떨쳤다. 저서로는 『퇴성헌유고(退省軒遺稿)』 12권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