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0년(광종 11) 제관은 광종의 명을 받고 중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 때 광종은 “교승(敎乘) 가운데 『지론소(知論疏)』 · 『인왕소(仁王疏)』 · 『화엄골목(華嚴骨目)』 · 『오백문론(五百門論)』은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였으며, 또 "중국에 가서 스승을 구한 다음, 어려운 질문을 던져 대답하지 못하면 곧바로 책들을 거두어 가지고 올 것"을 당부하였다.
중국에 간 제관은 나계사(螺溪寺)의 의적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고 10여 년 동안 함께 천태학을 연구하였다. 그때 자신의 유일한 저술인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를 지었으나, 상자에 감추어 두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제관은 끝내 귀국하지 못하고, 어느 날 앉은 채 죽었다. 죽은 뒤 그가 쓰던 상자에서 빛이 났으므로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상자를 열어 보니 『천태사교의』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천태사교의』는 천태 지의(天台智顗, 538∼597)가 제시한 교판론(敎判論)과 수행론(修行論)을 간결하게 정리한 책이다. 곧 천태학의 요지를 교(敎)와 관(觀)의 2문(門)으로 보고, '오시팔교(五時八敎)'의 개요를 간추려 해설하면서, 관심(觀心)의 25방편(方便)과 10승관법(乘觀法)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천태종의 교판서이자 교상(敎相)의 핵심과 관심((觀心)의 요체를 설명한 교학서이다.
이후 『천태사교의』의 주석서가 70여 종, 주석에 대한 주소가 130여 종 간행되었다. 대표적인 주석서로는 송나라 고승 종의(從義)가 엮은 『천태사교의집해(天台四敎儀集解)』 3권, 원나라 때의 승려 몽윤(蒙潤)의 『천태사교의집주(天台四敎儀集註)』 등이 있다.
의천(義天, 1055~1101)이 중국에 가서 지자 대사(智者大師)의 탑 앞에서 “옛날 제관이 교관(敎觀)을 전하였으나, 지금 대를 이을 자가 끊어지게 되어 제가 법을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찾아와서 대도(大道)를 구하나이다.”라며 기원하였다. 의천의 주도로 창립한 천태종에서는 제관에게 천태종의 조사라는 칭호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