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단(神壇)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었으나, 현재는 충주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다. 황석나루〔黃石津〕의 동쪽 남한강변에 냇돌로 담장처럼 만들어져 ‘신담’이라고도 불렸다.
1979년 12월충주댐 수몰지구 역사조사반에 의해 주요 유적으로 조사되고, 1982년 8월에 충북대학교에서 발굴 조사하였다.
본래 신단은 조선현종의 비인 청풍 김씨(淸風金氏)와 관련되는 전설이 전해져오던 곳으로 죄인의 시체를 버리던 곳, 고려장을 하던 곳 등으로 사람들이 근접을 꺼리던 곳이다. 발굴 결과, 길이 95m, 너비 30m 이상의 거대한 적석무덤이었으며, 표면에 고려시대의 무덤도 있었다.
표면의 고려시대 무덤은 적석무덤의 여기저기에 강물방향과 나란히 작은 석곽을 형성한 것이다. 여기서는 고려시대의 청자그릇조각·쇠가위·관못·머리뒤꽂이·수저·청동방울을 비롯해, 개원통보(開元通寶)·상부원보(祥符元寶)·소성통보(紹聖通寶)·황종통보(皇宗通寶)·경덕원보(景德元寶) 등 11세기의 화폐들이 나왔다.
이 고려시대 무덤 아래에는 긴 타원형의 적석무덤이 있었다. 모래점토의 다짐으로 3단의 구분을 두었다. 점토와 모래의 다짐은 매우 굳은 판축(版築)으로 되어 있고, 맨 윗부분에 기다란 대지상(臺地狀)의 석축이 있었다.
중요한 매장부는 시간과 경비부족으로 조사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출토된 유물에는 민무늬토기편·인문(印文)경질토기·승석문(繩蓆文)토기를 비롯해 심엽형(心葉形)장신구·쇠화살촉·쇠칼조각·금동(金銅)말치레거리조각·교구(鉸具) 등이 있어서 연대가 삼국시대의 중기인 3, 4세기경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신단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양평리의 적석무덤이 분포하고, 동쪽으로는 도화리의 적석무덤이 있어 적석무덤의 한 분포지역임을 보여준다. 이 지역의 무덤은 모두 굳은 점토모래다짐 위에 강변의 냇돌로 표면을 2, 3중으로 덮은 형식으로, 우리 나라 삼국시대 무덤양식과 편년연구에 매우 특이한 문제를 제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