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종 때 삼포왜란이 일어났던 곳의 하나이다. 1443년(세종 25)에 계해조약에 의하여 왜인들에게 삼포(三浦: 부산포·제포·염포)의 왕래를 허가하였다.
왜인들의 상주를 불허하였으나 그들이 상주를 간청하므로 포구마다 왜관을 설치하여 60여 명 정도만 거주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왜인들의 상주 인구가 점점 늘어 제포에만 500여 호에 이르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 사람과 여러 가지 충돌이 잦게 되자 왜인들의 단속을 강화하게 되었다. 1510년(중종 5)에 왜인들이 대마도의 원병과 함께 난(庚午亂)을 일으켜 제포첨사(薺浦僉使) 김세조(金世釣)를 살해하고 제포와 웅천(熊川)을 점령하였다. 정부에서 급히 토벌군을 보내어 왜인 300여 명을 참획(斬獲)하여 제포성을 복구하였다.
그 뒤 한동안 왜인들의 거주를 허가하지 않다가 부산포와 함께 이들의 거류를 허가하였다. 제포진은 하나의 큰 성으로서 주위가 4,000여 척이나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우도수군첨절제사영(右道水軍僉節制使營)이 있어 안골포(安骨浦)·사량(蛇梁)·당포(唐浦)·영등포(永登浦)·옥포(玉浦)·평산포(平山浦)ㆍ적량(赤梁) 등을 관할하였으나, 뒤에 절제사영이 부산 쪽으로 옮겨짐에 따라 수군만호가 남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이 지역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시되던 곳이었다. 제포 앞 바다에는 가덕도(加德島)가 있어 임진왜란 때 원균(元均)과 왜군이 격전을 벌였던 곳이었다. 제포는 웅천 뿐만 아니라 창원을 방어하고 마산포의 조운(漕運)을 돕는 구실을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부근에 사화랑(莎火郎) 봉수가 있었고 보평역(報平驛)을 통해 김해ㆍ창원ㆍ안골포 등과 이어지는 도로가 발달하였다. 1908년에 창원부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에 창원군에서 진해시로 편입되었다. 이후 2010년 7월에 진해시가 창원시에 통합되면서 창원시 진해구로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