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횡성(橫城). 문하시중 조충(趙冲)의 손자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조계순(趙季珣)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장인인 김방경(金方慶)의 세력에 힘입어 원종 때 낭장겸감찰사(郎將兼監察使)에 임명되었다.
일찍이 행수(行首)로서 입직(入直)할 때 밤이 늦어 대궐문이 닫혀 못 들어가자 원종이 문틈으로 들어오라고 명하였으나 이는 도리가 아니라고 거절하여 그 곧음이 당시 사람들에게 알려져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궐직문제(闕直問題)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271년(원종 12) 김방경이 진도의 삼별초를 토벌할 때 장군으로 기용되고, 1274년 여원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김방경을 따라 출전하여 공을 세웠다.
1280년(충렬왕 6) 대장군으로 천호(千戶)가 되었고 제2차 일본정벌 때 원제(元帝)로부터 소신교위관군총파(昭信校尉管軍摠把)에 임명되고, 1284년 대장군으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와 우부승지를 거쳐 1287년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그 뒤 병으로 면직이 되자 왕은 조변의 사위 유서(庾瑞)를 낭장으로 임명하여 위로하기도 하였다. 용모가 빼어나고 전고(典故)에 정통하였으며, 성품이 관후하여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1288년 지밀직사사로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