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경로(敬魯). 평양 출신. 아버지는 전행숭령전참봉(前行崇靈殿參奉) 조인택(趙寅澤)이다.
1865년(고종 2) 지경연(知經筵), 1868년 행상호군으로 판의금부사·이조판서, 1870년 예조판서, 1871년부터 다음해까지 판의금부사, 1872년 이조판서, 1873년 판의금부사, 1875년 청사(淸使)의 원접사(遠接使)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876년 1월 조일수호조약이 체결될 때 이에 반대하여 조정을 비난하였다고 탄핵되어 전라도 영광군 추자도(楸子島)에 유배되었고, 아들 조채하(趙采夏)도 아버지를 음조하였다 하여 평안도 위원군에 유배되었다. 3년 뒤인 1879년 2월 향리로 방축되었고, 12월 탕척서용(蕩滌敍用)의 하명이 있었으나 등용되지 않았다.
임오군변 직후 재등용되어 6월 의정부좌참찬, 7월 예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인 1883년 4월 대원군의 당여로 군변에 가담하였다고 탄핵되어 임응준(任應準)·조우희(趙宇熙)·이회정(李會正) 등과 함께 원악도(遠惡島)로 유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 : 집 둘레에 가시 울타리를 쳐 유배된 죄인이 그 안에 있도록 함)하도록 결정되었고, 뒤이어 곧 사사(賜死 : 죄인에게 독약을 내려 스스로 마시고 죽게 함)되었다. 조채하도 역시 사사되었다. 1894년 칙령 제25호에 의거하여 복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