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별·기별지(奇別紙)·조지(朝紙)·저보(邸報)·저장(邸狀)·저지(邸紙)·난보(爛報)·한경보(漢京報) 등으로도 불렸다.
조보기란 조정의 소식 또는 조정에서 내는 신문이라는 뜻이다. 일반 백성들에게는 기별 또는 기별지로 통하였는데, 기별은 곧 소식이라는 뜻으로 조보가 소식을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조보의 기원에 대해서 차상찬(車相瓚)은 『조광(朝光)』(1936.11.)에 쓴 「조선신문발달사」에서 신라시대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 알려진 조보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종실록』 제38권의 중종 15년(1520) 3월 26일자에 실려 있는 기록이다. 이 조보는 중종 이후부터 고종에 이르기까지 계속 발행되어 왔으며, 1895년 2월 『관보(官報)』로 바뀌면서 없어졌다.
승정원(承政院)에서 발행하였던 조보는 정부의 공보매체 내지 관보로서, 봉건통치의 보조적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오늘날의 관보와 비슷한 성격 및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정부의 결정 및 지시와 공지사항들만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선왕조가 그 정치제도 및 사회질서의 유지·강화를 위한 사상적 지주로 내세웠던 윤리관·사회관·세계관 등 유교적 사상을 전파, 선전, 침투시키는 수단으로서의 기능도 담당하였다는 것이 특색이다.
즉, 현실적인 행정보조수단인 동시에 정치상의 사상적 무기라는 이원적 성격 내지 기능을 유기적으로 지니고 있었다.
조보에는 단순한 보도사항인 조정의 소식보다도 관민의 사상과 여론의 계도(啓導:깨치어 이끌어 주는 것)를 위한 내용들이 더 많았을 뿐만 아니라, 되도록 단순한 소식들도 유교사상과 관련시켜 다루었다.
그 발행은 엄격한 통제 아래 군주의 지시대로 하였다. 발행절차는 승정원에서 국가통치상 필요한 사건들에 대한 소식을 취사선택하여 그 자료들을 산하기관인 조보소에 내려보내면 조보소에서 이들을 발표하였다.
발표된 소식은 각 관청이나 기관으로부터 파견된 서리[奇別書吏]들이 그곳에 와서 서사(書寫)하여 각자의 기관으로 발송하였는데, 그 서사된 것이 바로 조보였다.
필사된 각각의 조보는 필사자에 따라서 그 내용과 체재가 동일하지 않았으나 처음 필사된 것은 다시 계속 복사되어 여러 산하기관 또는 독자들에게 배포됨으로써 이러한 과정에서 또다시 그 내용과 체재가 다소 변질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인 쿠랑(Courant,M.)은 그의 저서 『조선서지(朝鮮書誌)』에서 “이 신문(조보)은 모두 동일하지 않으며 고관들이 보는 것일수록 더 완전하다.”고 기술하였다.
또 “이 신문은 매일 오전에 나오므로 이는 그 전날 저녁부터 밤에 이르는 사이의 전교(傳敎:임금이 내린 명령)와, 또 그날 아침의 전교도 포함한다.”고 기술하였는데 이 기록으로 보아 정기적으로 매일 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보의 내용은 대체로, ① 국왕의 모든 명령과 지시를 포함하는 전교, ② 당면정책 및 중요 문제들에 대한 유생과 관료들의 건의인 소장(疏狀), ③ 이에 대한 국왕의 비답(批答:상소에 대한 임금의 하답), ④ 국왕이 관민들에게 보내는 회유문인 윤음(綸音), ⑤ 조정에 의한 관리의 인사, ⑥ 자연계 및 사회에서 발생한 특이한 현상들인 기문기사(奇聞奇事), ⑦ 중앙 및 지방의 각 관서로부터 국왕에게 올리는 각종 보고서와 복명서 등에 관한 기사 등으로 광범한 내용을 다루었다.
또 오늘날 신문의 사회면 기사에 해당하는 천재지변과 기문기사에 관한 소식이 실리기도 하였는데, 예를 들면 ‘네 발과 네 개의 날개를 가진 병아리의 출현’, ‘큰 우박이 내려 날아가는 새와 사람을 죽인 사건’, ‘흰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었던 천체의 이변’ 등에 관한 소식이 그러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보도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라기보다, 천재지변이 일어난 원인이 백성이나 관료들이 인륜을 배반하였거나 가혹한 정치를 한 결과임을 암시해주 어, 관민들이 스스로 반성하여 봉건사회질서를 유지하도록 하려는 의도에서였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 밖에 농사에 관한 내용들도 게재되었는데, 이는 그 당시가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통치자들이 농사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던 결과라고 보겠다.
조보의 크기는 대체로 세로 35㎝이고 길이는 일정하지 않았다. 제호나 기사의 제목도 없었으며, 다만, 발행일자[日附]만이 매호의 첫머리에 적혀 있을 뿐이었다.
편집에 있어서도 아무런 배려가 없어서 각 기사들을 그 사건의 처리된 순서에 따라 기록해 나갔을 뿐이었다. 기사는 붓으로 필사하였으며, 서체는 이른바 ‘지별글씨’라고 불리는 특수한 초서체를 사용하였다.
사용문자는 물론 한문이었으나 모든 문장이 한문식 표현은 아니었고 이두식 표현을 섞어 쓰기도 하였다. 당시의 우리나라 인쇄기술 수준으로 볼 때 조보는 충분히 인쇄될 수도 있었으나, 인쇄하자는 신하들의 논의를 왕이 여러 번 묵살한 것으로 보아 그 배포 범위를 제한, 통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필사만을 하게 하였던 것 같다.
또, 왕은 조보의 내용까지 엄격히 통제하여 게재할 사항들과 게재하여서는 안 될 사항들을 직접 지시하기도 하였다. 1578년(선조 11) 민간인들이 생계를 위한 방편의 하나로 이른바 민간 조보를 인쇄하여 발행한 사건이 발생하자, 선조는 곧 그 발행을 중단시키고 관련자들을 모두 유배시킨 일이 있었다.
조보의 배포 범위는 원칙적으로는 삼공(三公:삼정승. 태위·사도·사공의 총칭)·판서·한성부윤 및 기타 중앙관의 서장, 그리고 지방의 절도사·병마절도사 등 현직 및 전직 고급관리들에게만 배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공식적으로 일부 사대부들까지도 볼 수 있었던 것 같으며, 조선 말기에는 기별서리나 조보를 배포하던 기별군사(奇別軍士)들에게 돈을 주고 일반 양반계급들도 이를 입수해 읽기도 하였다고 하나, 일반 대중과는 거의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그 영향의 범위도 적었다.
그러나 조정의 입장에서 볼 때, 조보는 조선의 정치적 이념이었던 유교사상을 백성들에게 주입시켜 백성들로 하여금 그에 따라 행동하게 함으로써 조선 왕조의 봉건체제 확립과 그 유지 및 강화에 상당한 공헌을 해 왔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사대부 계급들에게는 조정의 정사에 관한 관심 내지 호기심도 어느 정도 만족시켜 줌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신문으로서의 기능도 어느 정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