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극장(朝鮮劇場)은 1922년 경성 인사동에 약 10여 만원 정도의 건축 비용을 들여 지은 3층 벽돌건물로, 영화 상영과 연극 공연을 겸한 장소였다. 1937년 6월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그 터[종로구 인사동 130]만 남아 있다.
조선극장이 준공될 당시에 원각사(圓覺社)·광무대(光武臺)·연흥사(演興社)·장안사(長安社)·단성사(團成社)·우미관(優美館)·경성좌(京城座) 등의 극장들은 영화 상영을 주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무대가 좁게 설계되어 연극을 공연할 수 없었다. 조선극장도 처음에는 영화상영을 위한 영화상설관으로 허가를 받았으나, 건축도중 그 목적을 추가·확대하여 연극 공연을 가능하도록 무대를 재설계하였다.
1922년 11월 개관프로그램은 1편의 서양영화 상영과 이동백(李東伯)의 판소리 독창, 5대 권번[券番: 일제 강점기 기생들의 기적을 두었던 조합]기생들의 가무유곡(歌舞有曲) 및 서양 댄스와 윤백남(尹白南)이 연출한 만파회(萬波會)의「쟌발잔」공연이었다. 이어서 토월회(土月會)의 창립공연도 이곳에서 가졌다.
그 뒤 토월회의 정기공연은 물론 안광익(安光翊)을 대표로 한 민중극단(民衆劇團), 변기종(卞基鍾)이 중심이 된 민립극단(民立劇團), 홍노작(洪露雀)·박진(朴珍) 등의 산유화회(山有花會) 공연을 조선극장에서 올렸다. 1930년대에 들어서는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가 제2회 하기극예술강습회(1931년 8월 10일부터 2주간)를 실시하였고, 직속 실험무대(實驗舞臺)가 제1회 시연작품, 홍해성(洪海星) 연출의「검찰관」을 공연하였다. 다른 영화상설관과 달리 이 극장이 연극공연을 겸한 공연장이었기 때문에, 많은 극단과 단체들이 조선극장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1935년에 동양극장(東洋劇場)이 최상급의 시설과 무대를 갖춘 연극상설극장으로 건립, 개관되자 여러 극단들은 좋은 시설과 저렴한 극장세를 내세운 동양극장을 선호하였고, 조선극장은 본래의 취지대로 영화상설극장으로 전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