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연극사(朝鮮硏劇舍)는 1920년대에 지방연극을 주도했던 신파극단 김소랑(金小浪)의 취성좌(聚聖座)가 해산되자, 그 단원이 주류가 되어 1929년 12월 서울에서 창단한 단체이다. 그 구성원은 흥행사(興行師)로 명성이 높았던 지두한(池斗漢)을 중심으로 천한수(千漢洙)·변기종(卞基鍾)·이경환(李敬煥)·강홍식(姜弘植)·왕평(王平)·이경설(李景雪)·전옥(全玉)·이애리수(李愛利秀)·나효진(羅孝鎭) 등 30여명이다.
조선연극사는 ‘조선에서 연극을 연구하는 유일한 집’이라는 뜻으로 이들은 사재를 털어 자금을 지원한 지두한을 전무로 하여 철저한 동인제로 출발하였다.
이 극단의 목표는 민중계몽(民衆啓蒙)과 전문극장 건립을 통한 연극의 직업화였다. 20여 명의 밴드부와 대중연극의 스타급 배우들로 이루어진 이 극단은, 1929년 12월 21일에 단성사(團成社)에서 「눈먼 동생」·「오만원의 재보(財寶)」·「카푸에의 짜스」·「낙화유수(落花流水)」 등의 작품으로 창립공연을 가졌다.
당시 서울의 2대 극장인 조선극장(朝鮮劇場)과 단성사를 석권한 조선연극사는 박영호(朴英鎬)·임서방(任曙昉)·임선규(林仙圭)·왕평·이운방(李雲芳)·신불출(申不出) 등을 전속작가로 두었으나, 1931년 7월 신불출 일파가 탈퇴를 하였다. 연출은 일본 유학 출신 천한수가 맡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홍해성(洪海星)이 전담했다.
초기에는 「부활」·「눈먼 동생」·「결혼신청」같은 번역극을 주로 하다가 민중계도(民衆啓導)에 차질이 있음을 깨닫고 창작극 중심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 극단이 공연한 대표적 창작극은 박영호 작 「신라의 달」·「개화 전야」· 이운방 작 「불량자의 아버지」와 「불여귀(不如歸)」·「경성야화(京城夜話)」·「코스모스 호텔」·「아리랑」·「눈오는 밤」·「스피오네」·「경성행진곡(京城行進曲)」·「여학생 일기」·「인간정목(人間丁目)」·「인류야 양신과 같이 있어라」·「천당만원(天堂滿員)」 등이며, 이 외에도 많은 작품들이 있다. 1935년에 동양극장이 설립되어 상업연극인들을 집결시키자, 극단의 활동이 점차 미미(微微)해지면서 결국 해산하였다.
이 극단은 인기극작가인 박영호·임선규 등과 최고의 연출가였던 홍해성의 가담으로 연극계의 주목을 받은 1930년대의 대표적 신파극단이었고, 고정관객을 많이 확보한 인기극단이었다. 이 극단 출신들은 다시 상업극단인 연극시장(演劇市場)·신무대(新舞臺)·삼천가극단(三川歌劇團) 등의 모체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