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사변 전부터 간도(間島)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 농민들은 대부분 소작농이었다.
이들은 중국인 지주나 고리대업자들로부터 매우 불리한 영농자금을 차입하고 있었거나 부당한 소작계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높은 소작료와 고율의 금리라는 질곡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언론을 통해 조선 국내에 전파되면서 조선에서는 재만 한인의 민생문제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안이한 자세를 비판하거나 즉각적인 조치를 요구하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총독부에서는 간도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 농민들을 자작농화(自作農化)한다는 목표를 정하였다. 그리고 이에 따라 1932년도부터 5개년 간 매년 10만 원씩의 총독부 보조금과 30만 원씩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출자금을 가지고 토지구입, 주택건축, 역축(役畜) 구입, 기타 영농자금 대부 등을 통해 2,500호의 자작농을 창출해 낸다는 계획하에 식민사업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에 이어서 만선척식주식회사도 한인 소작농 대신에 중국인 지주로부터 토지를 매입한 뒤 적당한 기한의 연부상환(年賦償還)을 조건으로 매입한 토지를 한인 소작농에게 양도해 그들을 자작농으로 만들어 만주국의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추진하였다.
특히 만선척식주식회사의 조선인 자작농창정 실태를 살펴보면,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창정된 농가는 9,224호이었고 이들에게 양도한 토지면적은 4만 1579정(町)이었으며, 이들에게 대부된 금액은 613만 8210원이었다.
그러나 이 사업을 통해 대부금액을 모두 상환하고 양도받은 토지를 자신의 소유지로 전화시킨 한인 농가는 극히 적었다. 왜냐하면 당시 한인 농민들이 잉여농산물을 창출해 대부금액을 상환하면서 점진적으로 양도받은 토지를 자신의 소유지로 전화하기에는 생산규모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뿐만 아니라, 역축이나 농기구, 영농자금의 결핍, 낙후한 농경기술 등으로 인해 한인농민들의 농업생산성도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작농창정 사업에 참여한 한인 농민들은 종래의 중국인 지주의 소작농 신분에서 만선척식주식회사의 소작농 신분으로 전이(轉移)되었을 뿐 근본적으로 그들의 생활이 개선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인자작농창정 사업은 결국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