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로부터 창극이 갈라져 나온 것은 원각사(圓覺社)가 설립된 1908년 경이었지만, 초기는 대체로 입체창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가 발족되면서 창극은 연극성을 살려 그런대로 모양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1936년 조선성악연구회 산하 창극좌(唱劇座)가 창단되면서 본격적인 창극단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조선창극단(朝鮮唱劇團)은 1942년 9월에 조선성악연구회 직속 창극좌와 또 하나의 창극단인 화랑창극단(花郞唱劇團)이 통합한 것으로, 실제로는 분산되었던 성악연구회의 재결속인 셈이다.
이 극단은 박석기(朴錫紀)·허순구(許舜九)의 지도 아래 최남선(崔南善)·이광수(李光洙)·정노식(鄭魯湜) 등이 극본·고증·가사를 맡았고, 무대미술은 김은호(金殷鎬)·허백련(許百鍊) 등이 도왔으며, 의상은 유자후(柳子厚)가 후원한 최고의 진용이었다.
단원도 성악연구회의 주류가 참가하였다. 이들의 레퍼토리는 전래의 판소리 다섯마당과 「배비장전」·「장화홍련전」·「유충렬전」 등 고대소설 각색극과 각색사극(脚色史劇) 「마의태자」·「황진이」·「백제의 낙화암」·「재봉춘(再逢春)」·「빈부」·「항우(項羽)와 우미인(虞美人)」·「논개」 등 신작 창극도 여러 편 공연하였다. 이 밖에도 「춘향전」·「심청전」·「흥부놀부」·「보은표(報恩瓢)」 등을 공연하였다.
조선창극단(朝鮮唱劇團)은 1940년대의 대표적 창극단체로 전국 주요도시와 농어촌까지 순회공연하는 등 식민지시대의 대중에게 唱(창)의 묘미를 만끽시켜 주었고, 광복 직후까지 활동하다가 1948년 「왕자 호동」공연을 끝으로 그 활동이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