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종보(宗甫), 호는 관아재(觀我齋) 또는 석계산인(石溪山人). 군수를 지낸 조해(趙楷)의 아들이며, 한성부 우윤을 지낸 조영복(趙榮福)의 아우이다. 이희조(李喜朝)의 문인이다. 171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천거로 등용되어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다.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홍의영(洪儀泳)의 『관아재화첩』 발문에 의하면 “본래 인물에 뛰어났으며, 겸하여 산수도 잘하였다. 금강산을 다녀온 뒤 화경(畵境)이 더욱 진보되어 명작을 많이 냈다. 고화(古畵)에 대한 논평을 좋아하였으나 간혹 지나친 점이 있어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며, “백악산(白岳山) 아래에 살면서 정선(鄭敾), 시인 이병연(李秉淵)과 이웃이 되어 교유하면서 시화(詩畵)를 논하였다”고 한다. 그는 화가 정선과 이웃하며 살았으며 그에 대한 기록을 다수 남겼다. 그가 정선을 위하여 쓴 「겸재정동추애사(謙齋鄭同樞哀辭)」는 정선의 생애와 회화 수련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담고 있다. 또한 뒤에 영의정까지 지낸 유척기(兪拓基)와 그 형제들과도 절친하게 지냈다.
인물화는 그가 가장 두각을 나타낸 분야였다. 1725년 유배 중인 조영복을 찾아가 담담한 격조가 살아 있는 도포 차림의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1735년 세조 어진 모사 명령을 받았으나 기술로 임금을 섬기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 하여 사양하였다. 이로 인해 수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절필하였다. 1748년 다시 숙종 어진 도사(肅宗御眞圖寫)의 감동관(監董官)으로 참여하라는 명을 받았고 결국 감동을 맡았다.
조영석은 윤두서와 더불어 조선 후기 풍속화의 성행을 이끈 인물이다. 자손들이 그의 작품을 모아 엮은 『사제첩(麝臍帖)』에는 바느질하는 여인, 새참을 먹는 농민들, 강아지와 병아리 등 주변의 일상을 관찰하고 그 장면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선비들이 소나무 밑에 자리를 깔고 둘러앉아 장기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장기도(將棋圖)」(간송미술관)를 비롯하여 「절구질」(간송미술관), 「말징박기」(국립중앙박물관) 등 그의 풍속화는 핍진한 묘사를 특징으로 한다. 조영석의 회화에는 관찰과 사생을 중요하게 여겼던 그의 회화관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후에 김홍도(金弘道)가 「말징박기」와 유사한 작품을 남기는 등 그의 풍속화는 이후 많은 화가들에 의해 전개될 풍속화의 유행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물화뿐 아니라 산수와 영모(翎毛)에도 능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에는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과 같은 화보를 임모하거나 다소 변형시킨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대체로 윤두서(尹斗緖)의 경우처럼 조선 중기의 전통 화법을 계승하면서 남종화법(南宗畵法)을 가미한 화풍을 특징으로 한다. 말년의 작품은 더욱 문학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이러한 그의 회화 세계는 이인상(李麟祥) 등에게 얼마간 영향을 미치는 등 조선 후기 문인화의 전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표작으로 서강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유음납량도(柳陰納凉圖)」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강상조어도(江上釣魚圖)」, 1733년에 그린 「방당인필어선도(倣唐人筆漁船圖)」, 그리고 「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 등이 있다.
1742년 선조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의 문집 『어계집(漁溪集)』을 개간하였다. 노년에 저술한 문집 『관아재고(觀我齋稿)』가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