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2년(성종 13)경부터 남효온(南孝溫)·홍유손(洪裕孫)·이정은(李貞恩)·이총(李摠)·한경기(韓景琦) 등과 동대문 밖 대밭 속에 자주 모이면서 중국 진나라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 소요건(逍遙巾)을 쓰고 세속적인 영화에서 벗어나 시(詩)·주(酒)·가무로 소일하면서 노자(老子)·장자(莊子) 등의 고고한 학풍을 토론하고 벼슬과 영리를 멀리하였으므로 청담파라 지칭하였다.
1498년(연산군 4)유자광(柳子光)이 “남효온은 김종직(金宗直)의 당여로서, 홍유손 등과 결당하고 고담(高談)과 궤설(詭說)로 사습(士習)을 상훼(傷毁)하니 국문하소서.”라는 상계(上啓)에 따라 체포되어 국문당하였는데, 같은 해 홍유손만을 치죄하고 나머지는 용서함에 따라 방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