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원옥(元玉), 호는 천은(天隱). 조봉빈(趙鳳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영국(趙榮國)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조운규(趙雲逵)이며, 어머니는 박사휴(朴師休)의 딸이다.
1756년(영조 32) 사마시에 합격하고, 176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교리·사간·승지 등을 거쳐, 1772년 이후 대사간·대사성·대사헌을 지냈다. 1777년(정조 1) 당쟁에 연루, 시파(時派)의 탄핵에 의하여 김수현(金壽賢)·최재흥(崔載興) 등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1789년 다시 등용되어 동지사(冬至使)의 부사로 정사 이성원(李性源)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 함경도관찰사, 병조·형조·공조의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797년 예조판서 재직시 영릉(寧陵)의 보수문제와 관련하여 파직당하였으나 바로 복직되어 한성부판윤에 올랐다.
이 때 장적편찬자료(帳籍編纂資料)인 호적단자(戶籍單子)의 소실사건이 발생하여, 이에 대한 책임으로 전 한성판윤 김문순(金文淳)과 함께 포천에 유배되었다. 그 뒤 곧 풀려나와 개성부유수·전라도관찰사·판중추부사 등을 거쳐 1800년(순조 즉위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문장에 뛰어났고 시에도 능하였으며, 육서(六書)에 정교하고 특히 해서(楷書)를 잘 썼다. 당시 사대부들의 금석문에는 그의 글씨가 많다. 저서에는 『천은난고(天隱亂稿)』 1책이 있고, 자신이 편집하여 엮은 시집 『창주한영(滄洲閒咏)』 1책, 그리고 그의 편저로 알려져 있는 시집 『산수영(山水影)』 등이 있다. 시호는 효헌(孝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