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덕행(德荇), 호는 운계(雲溪) 또는 자산(蔗山). 시문이 뛰어났던 조수삼(趙秀三)의 손자이다. 화원이었으며 감목관(監牧官)을 지냈다.
초상에 특히 뛰어나, 1846년 헌종어진도사(憲宗御眞圖寫)의 동참화사(同參畵師)로 참여하였으며, 1852년에는 철종어진도사, 그리고 1861년에는 철종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도사를, 1872년에는 경기전에 받들던 어진이 낡아 박기준(朴基駿), 백은배(白殷培)와 함께 태조어진 익선관본(翼善冠本)을 모사(模寫)하였다. 고종어진모사의 화사로 활약하는 등 이한철(李漢喆)과 더불어 당시 초상화의 쌍벽으로 지칭되었다.
1866년에는 『고종명성후가례도감의궤(高宗明成后嘉禮都監儀軌)』 제작에 참여하였다. 전기(田琦), 김수철(金秀哲), 허유(許維), 이한철, 유숙(劉淑) 등과 함께 김정희(金正喜)의 화평(畵評)을 통하여 그림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김정희는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에서 그의 「추림독조도(秋林獨釣圖)」에 대하여 화경(畵境)이 능히 폭중(幅中)의 세(勢)를 갖추었으나 구성의 묘가 부족하다고 평가하였다.
그가 남긴 산수화들은 남종화풍을 충실히 따라 깔끔하고 정돈된 맛을 풍기고 있으나, 전반적으로는 형식화가 두드러져 화면의 생기가 모자라 보인다. 그의 이러한 화풍은 조선 말기 화단의 주류적 사조를 이루었던 김정희파의 경향과 상통하는 것이나 그의 화격은 다소 뒤떨어진 편이다.
대표작으로는 「산외청강도(山外淸江圖)」,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강남춘의도(江南春意圖)」(최병한 소장), 「함흥본궁도(咸興本宮圖)」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