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은 1인이다. 우찬성·우참찬과 함께 3의정을 보좌하면서 대소 국정에 참여하였다.
1400년(정종 2) 고려 충렬왕 이래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가 의정부로 개편될 때의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서 비롯되었다. 좌참찬의 명칭은 의정부 성립 때의 문하시랑찬성사를 계승한 동판(의정)부사(同判府事)가 1414년 좌·우참찬으로 분립, 개칭되면서 일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명실상부하게 정착된 것은 1437년(세종 19) 10월 이후부터이다.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의 부활로 의정부 기능이 강화되자 소속관직도 재구성되었다. 이와 같은 역학관계 속에서 동판부사에서 분리된 우참찬을 계승한 참찬이 좌·우참찬 각 1인으로 분리되면서 정립되었다.
즉, 1414년 동판부사에서 분리된 우참찬을 계승한 참찬은 1433년 1월에 정원 1인의 우참찬으로 변천된 뒤, 그 해 12월에는 2인으로 증가되었다. 그 뒤 1437년 10월에 우참찬 2인이 각각 좌·우참찬으로 분리되면서 확립한 것이다.
따라서, 1414년에 동판부사에서 분리된 좌참찬과는 성격이 다르다. 즉, 1414년의 좌참찬은 1433년에 종1품의 찬성으로, 1437년에는 좌·우찬성으로 개칭되어 계승된 반면, 1414년의 우참찬이 얼마 뒤 좌·우참찬으로 분리되면서 정립된 것이다. 이것이 ≪경국대전≫에 명문화되어 후대로 내려오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관제개편으로 우참찬과 합해 도헌(都憲)으로 개칭되면서 폐지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의정부가 중심이 된 국정운영(의정부서사제)과 국왕(육조)이 중심이 된 국정운영(六曹直啓制)의 역학관계에 따라, 그 기능의 발휘에 소장(消長)이 있었다. 또한, 조선 초기의 전시기나 1437∼1453년(단종 1)에는 판서나 우참찬이 종1품의 판중추부사·우찬성에 승진하기 위해 좌참찬을 거쳐야만 하였다. 그리고 이조·병조판서의 상위에 찬성이나 참찬을 겸직한 판이조사·판병조사가 문선(文選)과 무선(武選)·병정(兵政) 등을 맡아 이조·병조를 지휘하는 실질적인 기능을 발휘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비변사 중심의 국정운영으로 의정부 기능이 마비되고, 품계는 육조판서와 같았으나 종2품 이상관이 겸하면서 비변사를 운영하는 비변사제조보다 못하였다. 군국기무(軍國機務)의 논의에도 참여하지 못했으며, 또 항상 임명되지도 않는 등 유명무실한 관직이 되었다.
그러나 1865년(고종 2) 비변사가 폐지되고 의정부 기능이 부활되면서 그 이전의 지위와 기능을 회복해 의정부 폐지 때까지 계승되기도 하였다. 물론, 비변사가 국정운영의 중심이 되었던 시기에도 재직자의 자질·가계 등에 따라 강력한 기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겸직으로는 내섬시제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