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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학자 정동유가 천문 · 역상 · 풍속 · 제도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고증 · 비판하여 1805년에 저술한 고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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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학자 정동유가 천문 · 역상 · 풍속 · 제도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고증 · 비판하여 1805년에 저술한 고증서.
내용

4권 4책, 또는 본(本)에 따라 4권 2책. 필사본.

전반부는 1805년(순조 5)에, 후반부는 1806년에 집필된 것인데, 필사본으로 전해오다가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 의하여 인쇄, 출판되었고, 1972년 서울대학교 고전간행회가 펴낸 규장각본의 영인본과 1971년 을유문화사가 펴낸 국역본이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긴 여름을 보내기 위하여 평일에 기억하고 있던 것을 적었을 뿐이라고 겸손의 말을 하고, 그 내용이 일정한 체계나 순서 없이 다루어져 있으나, 그의 비판적인 안식(眼識)은 이 책의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예를 들면, 한양정도(漢陽定都) 때의 무학(無學) 등에 얽힌 이야기의 진위비판(眞僞批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이름자에 관한 이제현(李齊賢)의 오류 지적, 정몽주(鄭夢周)의 선죽교혈흔설(善竹橋血痕說)에 대한 비판, 각종 읍지(邑誌)에 보이는 인물전기의 불가진신성(不可盡信性) 지적, 과거취사(科擧取士)에 33인이라는 한액(限額)이 33천(天)에서 나왔다는 ≪문헌비고 文獻備考≫의 오류에 대한 비판, 그밖에 ≪지봉유설 芝峯類說≫ 등 여러 전적에서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한 것 등이다.

또한, 그는 외국 사정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졌음을 볼 수 있으니, 즉 유구(琉球)에 대한 설명을 비롯하여 기독교와 네덜란드인 등에 대한 언급을 들 수 있다.

그리고 1801년 제주도에 표착한 흑인(黑人) 5명에 대하여 그들의 사용어휘를 한글로 채록해 놓은 것은 좋은 사료가 되고 있으며, 특히 훈민정음에 관한 그의 논술은 정음학(正音學)의 연원을 규명한 것으로 유희(柳僖)가 지은 ≪언문지 諺文志≫의 바탕이 되었다.

≪주영편≫의 하권 제1장부터 제12장 사이에는 훈민정음과 국어의 음운 등에 관하여 언급한 것이 있다. 제1항과 제2항에서는 문자로서의 훈민정음의 우수성을 논하였고, 제3항에서는 ≪사성통고 四聲通攷≫에 두 종류가 있다고 하였다.

제4항에서는 ≪사성통해 四聲通解≫에 실린 신숙주(申叔舟)의 ≪사성통고≫ 서문(실은 홍무정운역훈 서를 가리킨 것)을 고찰하였고, 제5항에서는 한자음의 종성으로 ㅱ, ○을 사용하는 것이 잘못임을 주장하였다.

제6항에서는 훈민정음 23자모이면 충분하다고 말하였고, 제7항에서는 서양의 자모를, 제8항에서는 입성의 본질을, 제9항에서는 종성부용초성(終聲復用初聲)이 옳다는 것 등을 논하였다. 이상의 여러 항목 가운데에서 참고될 만한 사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정동유는 제1항과 제2항에서 훈민정음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특히 표음문자로서는 완전한 것이라고 하였고, 그 중에서도 한자음을 표기할 때에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자모 전체를 총괄적으로 고찰할 때, 훈민정음 23자모이면 족하다고 하였다.

설음(舌音)·순음(脣音)·치음(齒音)에서 설상(舌上)·설두(舌頭)·순중(脣重)·순경(脣輕)·치두(齒頭)·정치(正齒)의 구별이 생기는 것은 다음에 보는 중성의 차이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이것을 가지고 따로 자모를 세워서 36자모로 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ㄹ’종성은 입성이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사이 ‘ㅅ’의 본질에 관하여 설명하기를, 사잇소리 ‘ㅅ’은 일종의 종성으로 오인되기 쉬우나, 이것은 받침이 아니고 합성명사 사이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촉음현상(促音現象)이라고 하였다.

곧 ‘귓속’의 ‘ㅅ’이나 ‘아○셤’의 ‘ㅅ’은 ‘귀’와 ‘속’, ‘아홉’과 ‘셤’을 이어 낼 때에 일어나는 하나의 영음(影音 ㆆ)현상, 즉 성문폐쇄음현상(聲門閉鎖音現象)으로서, ‘ㅅ’이 종성이 된 것이 아니며, 이런 경우 ‘ㅅ’이 위에 가 붙어서 ‘귓’이 되거나 아래에 붙어서 ‘쏙’이 되거나 다 같은 현상이라 하였다.

이러한 관찰법은 종성에 관한 설명에도 나타나서, ‘가갸’나 ‘각야’는 음이 같으므로, 아랫글자의 초성이 윗글자의 종성이 된 것으로서 훈민정음에서 말한 대로 ‘종성부용초성’이 옳다고 하였다. 이 밖에 ≪사성통고≫에는 세종이 지은 것과 신숙주가 지은 것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주영편≫에는 이상과 같은 훈민정음에 관한 기사 이외에 다른 항목에서, 포르투갈어와 중국의 남방 방언에 관한 100여 개의 어휘를 수록해 놓았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외국어 어휘를 수집하여 놓은 것으로서는 가장 초기에 속하는 업적이었다.

정동유의 이론은 유희에게 큰 영향을 주어서, 유희는 그의 저술인 ≪언문지≫에서 정동유의 이론을 계승 발전시킨 면이 많았다.

참고문헌

『한국문자급어학사』(김윤경, 동국문화사, 1948)
『고친 한글갈』(최현배, 정음사, 1961)
『주영편해제』(고병익, 서울대학교출판부, 1972)
『증보개정판 국어학사』(강신항, 보성문화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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