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울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봉수대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울산군에는 봉화가 임을랑포·아이포·이길·하산·가리·천내·남목·유등포 등 여덟 곳에 있었다.
이 봉화가 있는 곳이 남목천(南木川)과 인접해 있으므로, 이 봉화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나 있는 남목봉화라고 생각된다. 남목봉화는 북쪽으로 유등포봉화와 연락한다고 하였다.
『경상도지리지』에 보면, 천내봉화는 북쪽으로 남목봉화와 연락하는데 거리가 21리 305보 떨어져 있으며, 남목봉화는 북쪽으로 유등포봉화와 연락하는데 거리가 28리 15보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남목천봉수는 서쪽으로는 천내봉수, 북쪽으로는 유포봉수와 연락한다고 하였다.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보면, 남목천봉수는 울산부의 동쪽 30리에 있다고 하였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전국 봉수의 주요 간선은 5개 직봉으로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제2거(炬)는 '동래'에서 ‘서울’ 간으로 직봉 44개와 간봉 110개로 이루어졌다.
제2거 봉수에는 10개의 간봉 지선이 있다. 동래 간비오봉수에서 첫 봉화를 피운 간봉은 기장의 남산→아이→울산의 이길→가리하산→천내→남목→경주 하서지 등을 거쳐 안동의 봉지산 직봉으로 연결된다. 이처럼 남목봉수는 경상도 남동해안의 중요한 봉수 가운데 하나였다.
봉수대는 해발 192m의 봉대산에 있다. 지름 5m, 높이 6m의 원통형 석축으로 된 구조이다. 봉수대에는 3칸의 봉대사(烽臺舍)가 있었다. 이 봉수터에 있는 봉화사 건물이 봉대사였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조선 말기 전기통신법이 도입되고 봉수제가 폐지되자 봉수군들이 모두 산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남목천봉수의 봉군 박경원(朴景元)은 그대로 봉대사에서 살면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 봉대사에 절을 지은 것이 지금의 봉화사며, 손자 박동수가 이 절을 맡아 오다가 지금은 다른 사람이 절을 유지하고 있다.
이 봉수대는 박경원과 손자 박동수 및 그 후손들에 의해 지금까지 보존되어, 봉수대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조선시대 남동해안의 봉수제도와 봉수대의 실태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