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강통상장정 ()

근대사
제도
1882년(고종 19) 8월 23일,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에 의거하여 두 나라가 체결한 중강무역(中江貿易)의 재개에 관한 조약.
이칭
이칭
봉천여조선변민교역장정
목차
정의
1882년(고종 19) 8월 23일,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에 의거하여 두 나라가 체결한 중강무역(中江貿易)의 재개에 관한 조약.
개설

정식명칭은 봉천여조선변민교역장정(奉天與朝鮮邊民交易章程)이다.

체결과정

중강무역은 1646년(인조 24) 압록강의 난자도(蘭子島)를 중심으로 시작된 청나라의 춘추정기관무역(春秋定期官貿易)을 말한다. 이 무역은 1700년(숙종 26) 사무역(私貿易)이 성행하면서 폐단이 심해지자 폐지되었다. 그 뒤 대청교역(對淸交易)은 책문후시(柵門後市)로 이루어졌다.

1883년 2월 10일 의주에 도착한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魚允中)은 청나라의 동변병비도(東邊兵備道) 진본식(陳本植)에게 중강무역의 재개를 위한 조약 체결의 뜻을 밝힌 글을 보냈다. 13일에는 중강에서 청나라의 통화현(通化縣) 지현(知縣)인 장석란(張錫鑾), 안둥현(安東縣) 지현인 기령(耆齡), 위용통판(委用通判) 왕률(汪률) 등과 회동해 개시사(開市事)를 논의하였다.

뒤이어 17일부터 26일 사이에 진본식을 비롯한 청나라측 관원과 장정내용을 협의하였다. 동시에 삼강(三江)과 의주의 서호동(西湖洞) 등 교역 예정지를 답사한 끝에 3월 초 24조의 통상장정을 의정하였다.

이 통상장정에 관해 같은 해 8월 9일 청나라측에서는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 성경장군(盛京將軍) 숭기(崇綺), 봉천부윤(奉天府尹) 송림(松林)의 연명구주(聯名具奏)가 있었다.

그 뒤 10월 20일 총리아문(總理衙門)의 의주(議奏)에 대한 비답(批答)이 내려지면서 결정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예부(禮部)를 통해 조선에 전달되었고, 조선에서는 12월 1일 청나라측에 합의를 통고하였다.

내용

중요한 조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교역은 봉천성(奉天省)과 조선변계(朝鮮邊界)의 상민(商民)에 한하며 다른 나라는 제외한다.

② 중강 부근 구련성(九連城)과 의주 사성(四城)에 관잡(關卡)을 설치하고 시전(市廛)을 열 수 있으나 점방을 열고 창고는 설립할 수 없다.

③ 관잡에는 세무독리관원(稅務督理官員)을 두어 세를 징수하고 비류(匪類)를 조사한다. ④ 과세는 홍삼(紅蔘)에 대해서만 100분의 15로 하며 그 밖의 화물은 100분의 5로 하고 일용품은 면세로 한다.

⑤ 양약(洋藥)·토약(土藥)·군기(軍器) 및 그밖의 위금물(違禁物)의 판매를 금한다.

⑥ 장척(丈尺), 칭마(秤碼)를 통일해 야시(夜市)를 금한다.

⑦ 화물의 매매에 있어서 관원의 개입을 금한다.

⑧ 내왕문서에 있어서 조선측에서는 천조(天朝)·상국(上國)으로, 청나라측에서는 조선국·귀국 등으로 호칭한다.

참고문헌

『종정연표(從政年表)』
『고종시대사(高宗時代史)』 2(국사편찬위원회, 1970)
『淸季中日韓關係史料』 3(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1972)
집필자
권석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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